"이혼하는 중이야."

윤영 이야기

by 보나쓰

“짐 다 내렸을까요? 아주머니, 확인 좀 따로 해주세요.”

“네, 사모님. 스탠드는 여기 세울까요?”

아주머니가 거실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일단은 그게 좋겠네요.”


윤영은 짐이 두서없이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리 배치를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다. 가끔 큰 짐을 어디에 둘지 묻는 말이 들리면 대충 손짓으로 아무 곳이나 가리켰다.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 보였다. 짐이 들어오는 일이 잠시 멈추자 윤영은 소파 위에 털썩 앉아 버렸다.


“꼭 그래야겠니?”

“응.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도, 기대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 지금까지 내가 미안했다. 알았지만 사과하기가 쉽지 않았어. 그럴 수 있잖아.”

“그럴 수 있지. 하지 마. 사과. 여덟 해는 너무 길어. 지금까지 혼자였고,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갈래.”

윤영과 석준은 비슷한 대화를 몇 달 동안 반복했다. 윤영의 하얀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마치 대사를 외우듯 같은 말을 날이 갈수록 더 단단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나는 나갈 거야. 각서에 사인해 줘. 회사 정리될 때까지만 기다려줄 거야. 그다음엔 알지. 각서대로 위자료랑 다 해결하는 거야. 이게 나의 최선이야.”

“그래…….”

마침내 석준은 윤영을 더 붙잡지 않았다.

“집은 구했어?”

“구했어.”

“열이 시켜서 이삿짐은 알아서 해줄게.”

“괜찮아. 내가…”

석준은 윤영의 말을 막으며 이사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돕겠다고 했다. 윤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각서에 사인을 받고 일어서서 방으로 올라간 것이 끝이었다.


“형수, 다 됐어요. 저 갈게요.”

짐을 챙겨준 열은 석준의 오래된 술친구이자 동료였다.

“네, 수고하셨어요. 식사 대접은 못하겠네요.”

“형수, 조금만 쉬다가 돌아가세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주시고요.”

열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윤영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깐 무슨 생각이 스친 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시선을 피했다.

“오늘 감사했어요.”

그렇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사모님, 저도 가볼게요. 가끔 들를게요. 냉장고에 밑반찬 좀 넣어뒀어요. 식사 거르지 마세요.”

“아주머니는 이제 저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사람 입맛 까다로우니까 그거나 잘 챙겨주세요. 고생하셨어요.”

윤영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쥐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덧붙였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방 한 칸짜리 작은 스튜디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영은 아직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문밖의 달빛에 시선이 붙들린 것 같기도 했다. 큰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자신감에 차서 깨고 나온 가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윤영은 길을 잃은 어린 사슴처럼 몸을 떨며 먼지가 쌓인 침대 위로 누웠다.


낯선 냄새가 가득한 집 안에서, 윤영은 갖가지 물건들 사이에 놓인 또 하나의 물건처럼 보였다. 미동도 없이 엎드린 채 누워 있는 모습은 지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잠시 작동을 멈춘 물건에 가까웠다. 무겁고 침울한 공기가 앙상한 몸을 눌렀다.


그날 밤 열 시쯤, 석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나야. 열이한테 전해 들었어.”

“응.”

“집이 좀 좁다던데… 내가 다시 알아봐 줄게. 짐 다 풀지 말고 이주 정도만 기다려 볼래?”

“석준 씨, 우리 헤어지는 중이야.”

“알아. 그래도 자기가 편히 지냈으면 해서 그래. 그래야 내 마음이….”

석준은 말을 흐리며 울먹였다.

“석준 씨, 나 괜찮을 거야. 그냥 잘 지내줘. 그거면 돼.”

“윤영아, 내가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이런 짓을 하게 하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자유롭고 싶은 거야. 우리를 위해 열심히 살아준 거 알아.”

“나는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윤영아.”

“울지 마. 내 마음이 좀… 나도 조금 편해지면 그때 종종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 그때까지만 연락 말고 있어 줘. 부탁할게.”

“윤영아, 보고 싶다.”


전화기 너머로 석준의 흐느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윤영은 괴롭다는 듯 전화기를 가슴에 눌러 귀를 막았다. 그 사이 석준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귀에 대었을 때, 울음은 더 커져 있었다. 윤영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본 채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석준은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점점 더 크게 통곡했다.


“이게 다 뭐야?”

“그동안 내가 밸런타인데이도 한 번 못 챙겨줬잖아. 지나간 횟수만큼 선물을 샀어.”

“자기야….”

“이거.”

석준은 돌돌 말린 노란색 줄무늬 노트 한 뭉치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편지야. 자기가 없는 동안 매일 썼어. 받아줘.”


이사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석준은 차 트렁크에 그것들을 가득 싣고 윤영에게 와서 건네주고는, 몰아치는 비를 피하듯 서둘러 사라졌다.


윤영은 그가 두고 간 선물을 거실 한가운데 내려놓고,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가득한 편지를 한 장씩 읽어 내려갔다. 이번에는 윤영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하염없이 흐른 눈물에 몇 장은 흠뻑 젖어 나중에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윤영은 석준을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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