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관람자의 미술관 가는 길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없다’고 답한다. 뭔가에 몰입해 내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기억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저 일러스트를 그리고, 전시장을 따라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콘서트나 뮤지컬도 가끔 즐기지만, 아무래도 귀가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한 미술관 한쪽에 머무는 게 더 마음에 든다.
미술관에 가기 전의 설렘도 좋고, 새롭게 좋은 작품을 만나는 일도 좋고, 무엇보다 일상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는 듯한 감상의 시간을 사랑한다. 내가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내게 없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쌓여 있던 무언가를 덜어내고 나에게 본래 있었던 감정이나 모습들을 다시 찾기 위함이다. 작품들을 마주하다 보면, 내 안의 미련한 모습, 혹은 예쁨, 아픔, 불안 같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얼굴을 드러낸다.
그렇게 불쑥 드러난 감정들과 마주할 때, 나는 그림에 진심으로 감동받는다. 이 에세이집에는 전문가의 평이나 도슨트의 해설, 작가가 직접 남긴 작품 설명이 없다. 그저 내가 온전히 느끼고 만난 그 순간의 작품 이야기들만 담았다.
나는 언제나 예술작품에는 정해진 해석이나 옳고 그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사조를 알고 나서 더 보이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른 채로 감상했다 해서 작품의 가치가 훼손 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아르누보 사조의 대표작이라는 정보가 내 감상의 방식을 완전히 바꿀까? 나는 그저 클림트가 그린 몇몇 화려한 그림을 좋아하고, 그것을 바라보다가 행복해지는 내 진솔한 감정이 더 중요하다.
가끔은 예외도 있다. 작가나 그림에 대한 소소한 가십거리를 듣는 건 은근히 즐겁다. 예를 들면, 여성 편력이 많았다는 피카소의 이야기는 무심코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심지어 피카소를 쿨하게 떠난 프랑소와즈 질로 같은 인물 덕분에, 한 예술가의 그림을 볼 때 그를 천재 화가라는 직업 너머의 한 인간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이런 점이 나만의 미술 감상의 재미가 되기도 한다.
바삐 살아오다가 다시 미술관을 자주 찾게 된 뒤, 여행기가 각자 다르듯 나의 관람기 역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작하는 이 관람기가 내가 미술관을 찾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기를, 오히려 그 길에 불빛, 작은 등불 하나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