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관람자의 미술관 가는 길
조카가 고1이 되고 한 번도 시간을 같이 보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전시 보러 가자고 했더니 신이 나서 좋다고 한다. 마침, 한가람예술관에서 캐서린 번하드의 전시가 있다. 여학생이고 한참 인생이 재미없다고 느낄 시점이니 발색이 화려하고 재미있는 번하드의 전시는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를 데리러 가려면 삼십 분 정도 외곽도로를 타야 해서 서둘러 채비를 했다.
아침을 먹자마자 출발했는데 우리가 예술관에 도착하니 한 시가 다 되었다. 조카랑 수다를 떨다가 길을 놓치는 바람에 삼십 분 정도를 허비했다. 굳이, 그림만 보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 그것도 좋았다. 오랜만에 조카 속마음도 듣고, 고모표 잔소리도 좀 하고.
번하드 전시는 6월부터 있었지만 방학이라 사람이 꽤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산했다. 검은 커튼을 제치고 들어가니 일그러지고 화장이 얼룩진 얼굴의 여자들이 즐비하다. 번하드의 초기 작품들이라는데 정교하지 하는 자유분방한 붓질과 다양한 표현법에 화려한 색상이 더해져 감각적인 느낌을 주었다. 슈퍼모델들의 매력에 빠져 그녀들을 그리기 시작했다는데 번하드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얼굴과 표정에 집착했나 싶다.
공부할 시기는 놓쳤다고 생각되고, 다시 시작하려니 제게 맞춰서 수업을 해주는 학원은 없고 망막해서 뭉개져 있는 듯한 조카의 마음이 여자의 얼굴에 겹쳐졌다. 이 아이에게도 언젠가 눈부신 젊은 날이 올 텐데. 지금의 고민이 그림자가 되지 않고 자양분이 되기를 바랐다. 어떤 것이든 늦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너무 이르고 반짝이는 나이인 것을 조카가 깨닫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다.
빛나면서 동시에 부서진 듯한 모델들을 지나가니 본격적으로 번하드의 유머와 대중문화에 접목시킨, 그녀의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펼쳐졌다. 그녀의 예술은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가까이 있었다. 스와치 시계, 모로코 카펫, 욕실용품, 샤워기, 핑크판다, 포켓몬 등의 만화 속 캐릭터들. 대중적인 아이콘들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 더 짓궂고 밝게 움직이고 있었다. 열대의 타는 듯한 색상들을 아크릴물감과 그라피티에 사용하는 에어스프레이를 함께 써서 생생하게 살려냈다.
조카는 익숙한 캐릭터들과 재미있는 색상조합들을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았다. 조카가 보는 번하드의 세상과 내가 보는 번하드의 세상에 차이는 있었겠지만 우리가 함께 깔깔거리며 즐겁게 봤던 작품은 색색깔의 형광빛을 강하게 발하는 휴지더미였다. 앞으로 화장실 가기 무섭겠다면서 환한 웃음을 퍼뜨렸다.
끄트머리에는 번하드의 작업실을 보여주는 방이 있었다. 나 같으면 이 방에서 미쳐버리겠다 싶은 분홍과 초록, 파랑과 주황색이 조화롭지 않은 대비를 이루며 사방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물로 보아, 아마도 그녀에게는 끝없이 영감을 던져주는 방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영상에 보이는 그녀의 입술색도 밝은 핑크색으로 불을 끄면 입술만 보일 것 같았는데, 그녀의 일상이 전부 예술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물을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만 보지 않는 작가 특유의 순순하고 상상력 넘치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게 가장 반가웠던 캐릭터는 E.T였다. 번하드의 작업실 한 구석에 뜬금없이 서 있는 E.T 는 1984년에 개봉한 영화의 주인공 캐릭터로 조카의 말대로 목주름이 자글자글한 외계인이었다. 지구에 홀로 남게 된 E.T와 그 가정집 꼬마들과의 우정과 사랑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전거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뛰는 장면이었는지 기억한다. 번하드의 언니는 "캐서린과 E.T는 공통점이 많다. 외딴 교외에서 자라며, 그 장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일종의 존재론적 고통을 겪었다."라고 말했단다. 핑크색이 사위를 밝히는 그 방안에 손가락을 치켜들고 서있는, 주변의 작품들에 비해 자칫 초라해 보이는 작품 E.T 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건 필연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유치할 정도로 발색이 강한 색들을 입은 번하드의 작품들은 E.T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가들은 외부의 충격이나 내면의 변화에 따라 작품세계가 바뀌기도 한다. 다음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할 소재는 무엇이 될까 궁금해진다.
조카는 집에 돌아간 후에, 이삼십 장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내가 찍은 사진들과 그 아이가 찍은 사진들을 비교해 보면서 조카에게 어떤 멋진 말이라도 해줬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역시, 그 아이의 영혼이 예술작품들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다면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