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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의 당나귀

행복한 관람자의 미술관 가는 길

by 보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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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후텁지근한 날씨는 언제쯤 사라질까. 태국 여행에서 겪었던, 숨 쉬기조차 힘들던 칠십 퍼센트의 습도가 떠오른다.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금방 메이크업을 끝낸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이내 흘러내려 얼룩이 진다. 면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내고 파우더로 얼굴을 다시 두드린다. 감히, 샤갈 님을 만나러 가는 날인데 날씨가 왜 이럴까. 그러면서도 흥얼거린다. 역시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은 평일임에도 북적였다. 티켓을 사려는 사람,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 굿즈를 사려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아차차, 샤갈이지! 조용히 그림을 보고 싶어서 평일을 택했건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래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전시실에 들어갈 수는 있었다. 3, 4 구역을 빼고는 사진촬영이 금지라는 안내를 들으며, 사람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비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 전시실 안쪽을 채운다. 이럴 때면, 사람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치여 그림을 보면 마음이 급해지고, 그림과 나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로 시선이 끊기는 게 싫다. 그림을 마치 '걸치듯' 보는 기분이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샤갈의 다채롭고 선명한 색채였다. 위대한 작가의 팔레트에서 화폭으로 옮겨진, 감동스러운 조화와 아름다움. 나는 파리에서 꽃을 피운 샤갈의 정열적인 색감에 흠뻑 취해, 그 공간에 한 시간쯤 머문 듯하다. 보는 내내, 내 시선을 잡아끈 건 다름 아닌 '당나귀'였다.


샤갈의 유년시절을 그린 러시아 비테프스크 마을의 풍경, 연인의 그림, 스테인글라스 성서 시리즈에도 당나귀가 등장한다. 이 우스꽝스럽고 다양한 색채의 당나귀는, 내가 그 존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그림 전체를 압도했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나는 그림마다 당나귀를 찾게 되었다. 이 변색하는 당나귀는 샤갈에게 무엇이었을까.

전쟁 이후 바뀌어버린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에서 비롯된 당나귀. 그의 유년시절을 대체하는 상징이었을까. 사실, 보라색 수탉이나 염소도 자주 등장하지만, 나는 샤갈이 당나귀를 통해 고향이 아니라 온전했던 어린 시절의 세상과 순수한 자신, 어쩌면 그저 '자기 자신'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에게 가장 그리운 대상, 가시가 목에 걸린듯한 느낌과 비슷한 영매 같은 것은 쉽게 작품과 분리되지 않는다.


내 글에는 곧잘 돌아가신 아버지가 등장한다. 내게 당나귀는 나 자신이면서, 또 아버지이기도 하다. 나를 붙잡아주고, 믿어주고, 당당하고 멋진 여인으로 딸을 묘사해 주던 아버지. 그리고, 희생을 미덕처럼 여기던 나 자신의 흉터를 벗어던지고 오롯이 돌아오려는 내 모습. 그리고 쓰며 표현하다 보면, 그 존재가 더 짙어지고 선명해져 나의 구심점이 되어준다.


결국, 이 프랑스의 위대한 예술가는 당나귀를 통해 파리와 러시아, 사랑과 전쟁을 거치며 무수히 느꼈던 감정을 집약해 냈다. 당나귀는 그 자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그를 꺼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두 시간 가까이 샤갈의 방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예술적 허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전시가 끝나기 전에 다시 한번 보자고 결심하며 전시관을 나섰다.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을 떠올리며.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영역에서, 나는 실존하지만 꿈의 영역에도 있는 나를 당나귀를 통해 오롯이 투영하고 돌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던 마르크 샤갈은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다. 샤갈이 남긴 글 가운데, 다음의 글은 매우 유명하다. "러시아 제국도 소련도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신비에 싸인 낯선 사람일 뿐이다. 아마도 유럽이 나와 나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해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샤갈이 자신의 이중 국적에 대해 지녔던 생각과 감정은 그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샤갈은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도 제작했다. 또한 그는 판화, 무대 연출, 벽화에도 정통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샤갈이 너무나 다양한 미술 분야에 손을 댐으로써 그 예술적 깊이가 얕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아름다움은 사실 이러한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샤갈이 입체주의 미술을 접한 것은 1910년 파리에서였다. 그가 이 시기에 제작한 많은 작품들은 입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 <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1911~1912)와 <일곱 개의 손가락을 지닌 자화상>(1912)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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