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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랭그리터의 바다로 가는 길

행복한 관람자의 미술관 가는 길

by 보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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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이런저런일로 마음이 시끄러웠다. 마음속에 고여 있던 답답함은 좀처럼 흘러나가지 않았고, 밤은 점점 더 길어졌다. 수면장애도 심해졌고 머릿속은 늘 뿌연 안개처럼 어질어질했다. 생활은 흐트러지고 있었다. 때론 별일 아니라 여겼던 일이 뿌리째 일상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흔들린다는 걸 인지하기만 하면, 그 진동을 잘 가라앉히는 편이다.


이주 전 예매해 두었던 ‘앨리자베스 랭그리터’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전시는 9월까지지만, 그녀의 바다를 마주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은 자유로움이 넘치는 한여름이라고 생각했었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쬘 때, 그 해변의 채도도 더 또렷이 살아날 테니까.


전시가 열리는 공간은 ‘뮤지엄 209’. 처음 가보는 곳이다. 그림도 물론 좋지만, 나는 갤러리에 가는 일 자체를 즐긴다. 책 냄새를 맡기 위해 서점에 들러 책을 읽다 나오듯이 전시장의 무거운 공기와 정적, 벽면의 여백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언제나처럼 지도 앱을 열어 위치를 확인하고, 주차가 가능한지, 대중교통은 편리한지 살펴본다. 다행히 전시장은 호텔 안에 있었고, 호텔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전시에 어울릴 만한 옷을 골랐다. 행거에 걸린 옷들 사이에서 가장 가볍고 시원해 보이는 탱크톱과 헐렁한 리넨 팬츠를 꺼내 입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림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나를 전시하러 가는 것 같다고. 나는 그 말에 조용히 웃으며 동의한다. 멋진 그림을 바라보는 멋진 사람의 모습을 동경한다. 그림과 같이 하나의 풍경이 되면 좋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림 앞에 선 내 모습 또한, 그 공간 안에 놓이는 또 하나의 장면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머릿속을 비우기보다, 오히려 복잡한 내면을 고스란히 끌고 가 그림 앞에 조용히 내려놓고 싶었다. 그녀의 바다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마음을 쓸어 담아 먼바다로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을 맡게 될 일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한 시 무렵이었다. 전시장 입구는 호텔 로비와는 별개의 통로로 이어져 있었고, 3층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곧장 올라갈까 하다, 숨을 잠시 고르고 싶어 6층 카페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카페모카를 주문하고,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맑은 하늘 아래, 유리를 사이에 두고 햇살은 뜨겁지 않게 반짝였다. 그 조용한 빛이 내 안의 복닥거림을 천천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금빛 테두리에 하얀 유약이 곱게 번진 찻잔 안에서 커피가 식어갔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씩 음미하며 랭그리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전시를 보러 갈 때 일부러 사전 정보를 알아보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잠시 화가에 대해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자연을 주로 그려오던 랭그리터는 어느 시점부터 인물의 형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고, 물감을 꾹꾹 짜놓은 듯한 사람의 등장으로 비로소 화가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단다. 이전에 인터넷에서 그녀의 그림 몇 점을 본 적이 있다. 인물이 더해진 텅 빈 바다풍경은 마치 그녀의 화폭에 마지막 숨결을 불어넣은 듯 그림에 활기를 주는 듯했다.


3층으로 내려가 전시장에 들어서니, 두 명의 직원이 예매 내역을 확인하고 티켓을 건넸다. 그들은 관람객보다 서로의 대화에 더 깊이 빠져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정적을 뚫고 은밀히 흘러나오는 작품들의 목소리를, 그 미묘한 떨림을 사랑한다. 그 사랑을 느끼기 전에 필요 없는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


입장하자마자, 다양한 층위의 푸름이 눈앞에 펼쳐졌다. 랭그리터의 바다는 선명하고 시원했다. 푸르다기보다는 옥빛에 가까운 바다색. 스노클링을 즐기는 두 남녀의 형상이 화면 중앙을 채우고 있었고, 그들의 속삭임은 파도 위에서 출렁이며 멀리 번졌다. 캔버스 위 연녹색과 맑은 블루, 투명하게 비치는 채도가 가슴 깊이 더운 여름을 파고드는 듯했다. 그녀가 그린 바다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활기차고 자유로웠다. 그림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토록 환하고 눈부신 바다 앞에서, 내 마음이 어둠을 품고 있을 틈 따위는 없다고. 나는 그 바다의 수면 아래에서, 눌러두었던 감정 하나를 천천히 꺼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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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해변에 누워있는 사람들, 파도를 즐기는 서퍼들. 랭그리터의 그림 속에는 휴가와 쉼이라는 휴식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생기와 웃음소리가 묻어 있었다. 아이들이 알록달록하게 찰흙을 빚어 화폭에 담았을 것 같은 재밌는 화법이 그림을 더 생생하게 보이게 했다.


전시장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그녀의 육지가 나온다. 초록의 대지와 꽃, 길게 드리운 수풀. 벚꽃나무가 한창 피어 거리로 나온 사람들. 하지만 내 시선은 그 풍경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녀가 그리워했을 호주의 바다. 심취해서 바라보던 그 바다와 멀어진 다른 풍경은 내게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방향을 틀었다. 해변과 바다 그림에 둘러싸인 정중앙,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큰 창가 앞에 섰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 나는 서 있었다.


꿈꾸는 해변, 환한 물빛. 그 안에서 숨을 쉬며, 현실의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진짜 숨이 들이쉬어졌고, 말라붙어 있던 마음은 서서히 풀어졌다. 무겁게 짓누르던 일들과 명치 언저리를 눌러오던 갑갑함은 한 줄기 바람처럼 조용히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전시장을 나서며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익숙해진 조명이 벽을 따라 흐르고 있었고, 마지막 그림 앞에 선 누군가의 실루엣이 정지한 장면처럼 걸려 있었다. 밖으로 나서자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고, 석촌호수 너머로는 미세한 바람이 결을 따라 흘렀다. 누군가는 지금 막 그림을 보러 들어가고, 나는 이제 막 그 바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가방 속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내쉬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벼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뒤에 행사에서 랭그리터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물었다.

“저는 저 아름답고 드넓은 바다에 혼자 있고 싶은데, 왜 당신의 그림에는 여러 명도 아니고, 꼭 두 사람이 스노클링을 하고 있나요?”

“아, 그건 두 사람이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랭그리터는 그녀의 그림만큼 밝고 순수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화가였다.


엘리자베스 랭라이터는 시드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로, 활기찬 혼합 매체의 공중 시점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은 즐거움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호주에서의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다. 유쾌한 3D 캐릭터와 섬세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그녀의 독창적인 작품은 전 세계 수집가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홍콩, 싱가포르, 시드니, 서울, 뉴욕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며 엘리자베스는 세계 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혔다. 호주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그녀는 두려움 없는 창의성을 바탕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조명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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