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관람자의 미술관 가는 길
석파정 서울미술관까지는 내가 사는 곳으로 부터 운전해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강변북로로 갈아타야 하기에, 막힐 도로를 대비해 미리 커피를 준비하고 출발했다. 미술관에 가는 길이지만 부암동 쪽은 처음이라, 낯선 동네를 볼 수 있다는 설렘도 있었다. 예상과 달리 도로는 한산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유턴해서 잠깐 돌아오긴 했지만,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암동에 들어선 길은 구불구불했다. 주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미용실과 그 흔한 예쁜 카페도 보이지 않는 골목을 올라가면서, 낙후된 동네가 아닐까 생각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집들은 낮고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그런데 그 풍경이 어릴 적 자주 보던 동네를 떠올리게 해, 오히려 조금은 정겨웠다.
티켓을 받고 나면 1층부터 관람을 시작해 4층 석파정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다. 나는 곧장 석파정을 볼 수 있는 외부로 통하는 4층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고, 단정하고 나지막한 한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 속의 비밀의 정원’이라는 석판이 있었지만, 고종이 그곳에서 국사를 논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한적하고 산수가 수려해 쉼을 얻기에 더없이 적합한 집이었을 것 같다.
공기와 바람의 흐름을 고려해 창을 낸 지혜로운 집 구조와, 몇 백 년이 되었을지 모를 고목에 감탄하며 돌계단이 놓인 산길을 잠시 걸었다. 호암미술관이나 석파정 서울미술관처럼 정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건, 내게는 선물을 받는 것만큼이나 귀한 일이다.
석파정을 벗어나 곧장 그 옆에 위치한, 카와시마 코토리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건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표정 없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렌즈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잠시 그녀의 얼굴 앞에 머물렀다가, 패널로 막아 길을 낸 전시관의 흐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간간이 도시의 풍경을 담기도 했지만, 그의 프레임 속에는 주로 사람들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자연스럽고 장난기 어린 장면, 어린아이의 절실한 표정, 어른들이 보면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할 듯한 얼굴, 아이의 놀랍고 슬프고 행복한 코흘리개 시절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모두 카메라의 셔터가 눌러지는 그 현재의 표정을 반짝이게 담고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일반인 모델, 즉 작가의 친구를 찍은 연작들이었다. 유년기부터 소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오래도록 기록한 사진들.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래 지켜보고, 자신의 예술 안에 그 흐름을 녹여낸다는 건 얼마나 깊은 애정과 인내가 필요한 일일까. 감동하며 코토리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따라가게 되었다.
나는 첫 에세이집을 내는 데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사계절과 그 사계절의 상념과 쉼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코토리의 오랜 시간을 투자한 사진들 앞에서는 내가 처음부터 다소 건방졌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의 작품 앞에서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사진 속 인물들에는 따뜻함과 다정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멋이나 화려함보다는 소박함과 있는 그대로의 유머가 있었다. 예전에도 몇 번 인물 중심의 사진전을 본 적이 있다. 기억나는 한 번은 종군기자의 전시였는데, 폐허 속 아이들, 일그러진 얼굴, 흑백의 무게 속에 눌어붙은 노인의 감정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또 한 번은 무표정한 얼굴을 담은 작가의 전시였는데, 작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작품 속 얼굴들이 더 또렷이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코토리의 인물들은 밝다거나 어둡다거나 하기보다는, 담담하고 조용한 리듬을 지닌다. 어떤 인위적인 연출 없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줄 수 있는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끔 동물학대 범죄에 대한 뉴스를 보고 나면, 사람이 싫어지기도 하고 믿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의 사진은 사람의 선한 모습만을 담은 듯했다. 그가 포착하고 싶었던 순간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의 살아있는 표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거의 혼자 지내는 내 일상을 생각하면, 이번 전시는 오랜만에 가장 사람다운 얼굴들을 만난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이런 전시가 열린다면, 복잡한 길을 뚫고 가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닐 것 같다.
작가의 사진은 누군가의 성장기 같아 보이기도, 친구들의 여행기 같아 보이기도, 흔들리는 청춘들의 담담하고 재미있는 그저 그런 하루의 기록 같아 보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울에서 '너무 외로웠고, 외로웠기에 자유로웠고, 너무 추웠지만 모든 것들이 다 따뜻했다'라고 말한다. 다정다감한 카와시마의 사진은 모든 존재의 소중함과 함께 가장 반짝이고 아름다운 시간은 현재에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