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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검으로 화폭을 베는 화가 앨리스 달튼 브라운

무지한 관람자의 미술관 가는 길

by 보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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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전시를 함께 보고 싶은 동료가 생겼다. 그녀가 처음 제안한 것은 마르크 샤갈의 전시였지만, 나는 이미 다녀온 터라 이번에는 더현대 alt.1에서 열리고 있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전시를 추천했다. 무더운 여름, 환한 빛이 흐르는 그녀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친구도 흔쾌히 동의했고, 분당에서 여의도까지의 거리를 감안해 정오에 약속을 잡았다.


백화점에는 쇼핑객과 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로 낮시간에도 북적였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설임 없이 전시를 예매했었다. 점심을 먹는 내내 머릿속에는 작품을 직접 마주할 생각에 설렘이 가득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친구는 능숙하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녀가 찍어주는 내 사진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전시장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벽에는 흰색 시어커튼이 걸려 있었고, 봄바람처럼 부는 인공바람에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그 앞에 걸린 앨리스의 그림들은 마치 사진처럼 정교했지만, 동시에 화가만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사진 같다’는 표현이 화가에게 실례일지, 최고의 찬사일지 잠시 고민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한 장의 사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빛과 그림자, 관계와 구성이 얼마나 섬세하게 그려졌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전시에는 그녀의 습작도 많이 공개되어 있었는데, 연필 드로잉 하나까지도 세심함이 묻어났다. 앨리스는 사물의 형태보다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공간을 먼저 보는 듯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관계’였다. 처음엔 평범한 농가의 풍경처럼 보였지만, 한참을 들여다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 빛과 그림자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여러 방향에서 쏟아지는 빛이 각 건물에 서로 다른 표정을 만들어내고, 그 빛은 때로 부드럽게, 때로 날카롭게 벽을 타고 흐르며,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떠올렸다. 가까이 있지만 완전히 겹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 앨리스의 화폭에서는 그 거리가 결코 냉랭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이 그 간극을 따뜻하게 메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계’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를, 나는 이 미묘한 거리와 빛의 흐름,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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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풍경 섹션에서는 문과 창문, 커튼, 현관 등 일상적인 공간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가 명료하게 포착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려내는 빛에는 온화함이 깃들어 있었다. 안과 밖, 빛과 어둠, 열림과 닫힘의 경계 속에서 빛은 눈부시면서도 따뜻하게 공간을 감싼다.


“커튼은 우리의 의식에서 반쯤 숨겨진, 가려진 부분을 상징합니다”라고 벽면에 적혀 있었다. 나 역시 가끔 커튼 뒤 어두운 구석에 시선이 머문다. 앨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가려진 부분에 있는 존재는 그곳에서 느껴지는 으슬함, 어쩌면 나만의 두려움이나 상상의 괴물 같은 것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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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주제로 한 그림 중 ‘여름날의 산들바람’ 앞에 서자, 시원함과 눈부심, 방 안으로 쏟아지는 빛의 가루가 느껴졌다. 만약 그 방 창가에 누군가 서 있다면, 하얀 투피스 차림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을 커튼 사이로 흩날리는 여인이, 요트를 타고 돌아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봤다.


앨리스의 작품 속에서는 빛에 드러난 진실과 그림자에 숨겨진 비밀을 따라, 누구나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전시장을 나서는 길, 벽에는 “빛 없이는 모든 것이 무미건조해요”라는 문구가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그 글귀가 전시의 여운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한여름의 뜨거움을 잊고, 잘 정돈된 듯한 앨리스의 작품을 통해 흔들리는 바람과 빛을 품는 마음으로 전시관을 나섰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 작가입니다 창을 통과하는 빛, 흔들리는 커튼, 물 위의 반사처럼 일상의 찰나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고요하고 시적인 순간을 화면에 담아냅니다.
1943년 펜실베이니아 출생으로, 코넬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다양한 매체로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그녀의 회화는 '빛'과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고요한 아름다움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그녀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버틀러 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과 기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입니다.
(1998~2019)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가 절정에 이른 시기입니다. 자연과 건축적 요소의 조화는 더욱 섬세해졌으며, 화면 전반에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깊이 스며듭니다. 창을 통해 이어지는 실내와 외부, 수평선 위로 펼쳐지는 바다와 하늘의 고요한 풍경, 투명한 색채의 활용은 이 시기 작품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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