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확고한 신념이 하나 있었다.
가정환경이라든지 맞벌이셨던 부모님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환경이나 경험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튼 난 제법 어릴 때부터 아이는 꼭 내 손으로 키우겠다는 다짐을 꽤 자주 하곤 했었다.
집에 동생과 나만 있었던 시간이 많았고, 맏이였던 터라 내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내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 역시 늘 내 스스로 하곤 했다. 공부는 하루에 몇 시간을 할지, 학원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느 대학교 어느 과를 어떤 방법으로 갈지도 말이다. 부모님 역시, 바쁘셨거나 나를 존중하셨거나, 나의 선택에 딱히 이의를 제기하신 적이 없었고 난 내가 계획하고 선택한 대로 길을 걸어갔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선택은 포기하면서 그렇게 대학교 4학년 때까지 나름 순탄하다면 순탄할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대학교 4학년 2학기, 조용히 대학원을 준비하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암 투병과 회복을 반복하시던 아빠의 심각한 암 선고로, 난 대학 4년간 걸어갔던 방향을 완전히 틀어 평범한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마음으로 다잡고 일했던 나의 첫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일은 제법 재미있었다. 영어와 전공이었던 외국어까지 살릴 수 있었던 일이었고 사회 초년생이었던 만큼 열정과 흥미도 가득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민했던 것이 하나 있다면, 야근이 잦은 이 회사를 계속 다닌다면 절대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다소 보수적인 생각이라 할 있지만, 나에게 있어 아이를 품고 낳게 될 엄마로서의 가장큰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이유로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프리랜서 통번역가로의 길로 꿈꾸었던 것이었고, 고민 끝에 난 결국 25살의 나이에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할 수 있는 길에 도전했다. 그 첫 도전의 시작은 바로 영상번역가였다.
영화나 미드, 다큐멘터리 영상 등의 자막을 번역하는 영상번역은 일 자체가 영상물이다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지만,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첫 달에 40만원도 채 안 되는 돈을 받았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던 나에게는 큰 타격이었지만 시작인 만큼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수입이 늘어나리라는 보장도 없이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홀홀 단신의 20대여서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참 놀라울 만큼, 무모하지만, 용기있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외국어와 영화를 워낙에 좋아했던 덕분인지, 아니면 걱정 속에서 열심히 했던 덕분인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덕분인지, 아니면 셋 다였는지. 시간이 지나자 우려와는 달리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제법 많은 양의 번역을 소화해낼 수 있게 되었고, 괜찮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갔다. 짧은 시간과 짧은 자막 안에서 대화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영상 번역은 문서 번역과는 달리 재치와 센스를 많이 필요로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즐거웠고 그렇게 영상번역가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가면서 결혼을 했고, 첫째 아이를 낳았다. 여기서 내가 무척이나 간과했던 사실은, 재택 근무를 하면서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그 어떤 상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영상번역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은 무지하게 ‘빡세다’. 미드나 다큐멘터리 한 편을 하루 이틀 내에 번역해내야만 하는 마감의 압박과, 사람인 만큼 실수가 나오면(물론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작업 환경을 떠나 그 실수에 대해 책임과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부담감,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주어지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일이 없으면 일감이 떨어질까, 일이 많으면 마감에 늦을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프리랜서의 삶이었다.
신랑은 한창 사회 활동을 하던 젊은 나이였고, 양가 부모님의 도움은 일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독박 육아에 영상번역 프리랜서라는 커다란 두 개의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집에서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는 주위 사람들은, 시부모님과 친구들을 포함해서, 집에서 일을 하니 힘들지도 않고 얼마나 좋냐며 나의 노고를 무척 쉽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얘기하곤 했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선택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말은 나의 사기를 어마어마하게 꺾어놓곤 했다. 그 시기를 어떻게 잘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늘 잠이 부족했고, 스트레스는 쌓여갔으며 번역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육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터라 그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푸는 일은 결코 없었다.
탈출구가 필요했던 나는, 그때부터 나홀로 티타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남들은 회사를 다니기에 가방도 사고, 옷도 사고, 화장품도 샀지만 난 육아와 마감 사이에서 늘 질끈 묶은 머리와 쌩얼에 목이 늘어진 티셔츠만 입고 있었으니까. 자존감도 떨어졌고, 스트레스는 쌓여갔다. 이대로라면 내 자신의 마음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 나를 위한 보상으로 매달 찻잔과 차를 사서 집에서 매일 티타임을 즐기며 스스로를 힐링했다. 어떤 날은 단 5분, 10분에 그 시간이 끝나기도 했지만 아이가 늦게 일어나면 30분이 넘도록 나를 토닥이며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었고, 그 시간은 나에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덕분에 난 다행히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쌓여갔던 나의 취미, 차생활은, 둘째를 임신하면서부터 나의 세 번째 커리어가 되었다.
둘째를 임신하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마감을 칼같이 지켜야 하는 영상번역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었던 티(tea)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출산 때문에 마무리하지는 못했지만 대학원에서 동양차를 2년여를 공부했다. 또 이런 생활이 쌓여,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책을 쓰면서 차를 가르치는 차 선생님, 쉽게 말하자면 티 소믈리에가 되었다. 차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시간이 10년을 넘겼고, 지금까지 차와 관련한 서적도 4권을 출판하고 차 관련 서적 감수도 맡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더한다면, 최근에는 신랑의 주재 덕분에 인도에서 4년을 보낸 후 그곳에서 배우고 익히고 즐겼던 인도 문화와 요가를 바탕으로 지금은 티클래스와 더불어 인도 민화와 차 명상을 통한 힐링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다 보니, 나에게 우선은 육아이다. 갓난아이들만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상황이 허락한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가 곁에 있어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간섭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서적인 안정과 교감과 더불어 아직 미성년인 아이들의 보호를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 간 오전 시간 중에만, 집에서 클래스를 열고 있다.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의 방법이다. 나도 엄마이기 전에 사람이다 보니, 커리어에 욕심이 들 때도 물론 많다. 하지만 그 욕심들을 모두,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 또한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10년 뒤로 미루어두었다. 그때가 되면 하루의 많은 시간을 나의 커리어에 쏟아 부을 수 있는 본격적인 인생이 펼쳐지리라 믿는다. 살다 보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지만, 그 끈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지금보다, 50이 넘은 그때의 내 삶이 더욱 풍요로울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하기 위한 첫 시작, 나의 첫 도전은 아직까지는 순항 중이다.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이 도전은 특히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0대의 어린 나이부터, 여자가 아닌 아내와 엄마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그 모든 것을 현명하고 최대한 만족스럽게 그려나갈 수 있을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내가 그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 오랜 시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육아와 사회생활 병행이 아직까지도 남자에 비하면 더 쉽지 않은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친한 맞벌이 부부는, 남편이 아내의 빈 자리를 잘 채워주고, 아내 또한 남편의 부재를 잘 채워주면서 일과 육아를 나누어 병행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과 동갑인 그집의 두 아이들은 정서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안정된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단순히 맞벌이인지, 재택인지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을 가장 크게 뒤바꾸어놓을 ‘부모’가 되는 일에 있어서의 첫 도전,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고 얼마나 생각했는지에 따라 그 결과는 분명히 달라지는 듯하다.
그 고민은 더 빨리 시작하면 빨리 시작할수록 좋고,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작하는 게 좋다. 모든 사회화의 시작은 가족이다. 탄탄한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그 나라는 안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정을 꾸릴 때에는, 당장 눈앞이 아닌 먼 미래(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먼 미래가 아닐 수도 있다.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곤 하니까)까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배려하고, 준비해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나의 시작이자 첫 도전기는, 부모로서의 '나'였기 때문이다. 부모로 살면서 나를 찾기, 나로 살면서 부모의 책임을 다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고, 많이 고민했고, 좌절했고,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많이 생각하면서 준비했던 만큼, 이제와 생각해보면 제법 성공적인 도전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