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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파티

아메리칸 스타일의 할로윈 파티

첸나이에 거주하면서 아메리칸 스쿨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여러모로 아이들에게 참 좋은 경험이 되어 주었다. 솔직히 넓고 자유로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미국 학교이다 보니 미국적 사고와 교육, 문화를 배우고 동시에 인도에 있다 보니, 인도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에, 국제 학교의 장점들을 더 폭넓게 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차를 가르치고, 티파티를 즐기는 일을 하는 나인 만큼, 한국에서도 할로윈이 되면 파티를 빼놓지 않고 했었다. 할로윈이 갖는 의미라던지, 미국 문화라던지,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할로윈 시즌을 겨냥해서 나오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할로윈 티를 즐기면서 동시에 '파티'와 '축제'가 부족한 우리나라의 심심한 일상에 재미를 더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곳 첸나이에서 매년 가졌던 할로윈 파티는, 그야말로 진정한 할로윈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메리칸 스쿨에서는, 아침부터 갖가지 의상과 메이크업으로 변신한 선생님과 학부모, 아이들이, 할로윈 귀신과 유령, 박쥐, 공동묘지, 재미있는 캐릭터들로 가득 꾸며진 학교 안을 뱅뱅 돌며 사탕을 받고 즐기는 멋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날은 나를 벗어던지고 마녀도 되어보고, 해적도 되어보고, 요정으로 변신도 해보는 무궁무진한 기회의 날이었던 셈이다.


더불어 저녁이 되면 친한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모여 할로윈 파티를 즐기면서 아이들과 으스스하고 짜릿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외국'이라는 상황과 '외국 친구들'이라는 상황이 더해지니 이보다 더 할로윈스러울 수는 없었다. 나는 늙은 호박을 파서 잭오랜턴도 만들고, 마녀와 박쥐로 온 집안을 꾸며두었다. 마녀손가락 쿠키를 만들고 재미있는 할로윈 소품을 준비해서 분위기를 한껏 내보았는데 친구들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무서운 수박 귀신을 조각해온 친구, 미라 피자를 만들어온 친구, 빨간 음료를 준비한 친구...  우리는 진정 할로윈을 만끽했다.


가끔은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날을 즐기고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할 것 없이 말이다. 우리는 그런 축제와 파티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사람'이다 보니, 가끔 그날의 흥겨움이 그립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온 첫해에는 어김없이 집을 할로윈으로 꾸며두고 할로윈 파티를 즐겼다. 천장에 붙어 있는 박쥐를 보고 환호성을 질러 주고, 비록 우리뿐이더라도 즐거워해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리워할 수 있는 추억이 있어, 참 다행이라며 말이다.


13. 100년 만의 폭우

심상치 않은 겨울이었다. 첸나이는 원래, 5분 정도 폭우가 쏟아지면 온 거리가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하루 종일, 쉬임 없이 비가 내리더니 온 첸나이 시내가 물에 잠겼다는 소식이 들린다. 다들 집에 발이 묶여 있는데, 발전기가 미약한 집들은 전부 정전이고, 물자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기름이나 물, 식자재를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진짜 비상 사태다.


기사와 메이드도, 집과 도로가 전부 물에 잠겨 움직일 수 없다고 연락이 오고, 학교도 휴교령이 내렸다.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지만, 더 이상의 기름을 구하는 것도 걱정이다. 어느 새 전화도 끊기고 인터넷도 끊겼다. 그나마 같은 빌라 안에 한국 분들이 계셔서, 함께 의지하고 소식을 전하며 버티고 있었다. 발전기 기름이 부족해 밤에는 전원을 차단하고 저녁과 아침에만 발전기를 돌리기로 했다. 냉동고에 한국에서 사온 고기며 식품들이 가득한데 걱정이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물이 빠지지 않아 곳곳에서 한국인들의 사고 소식도 들리고 온 첸나이가 물에 잠겼다. 몇 년 전 쓰나미가 왔던 첸나이 이야기를 하며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도 쉬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놀 수 있어서 마냥 신이 나 있었다.


그렇게 3,4일이 지나고, 서서히 비가 그치고 해가 나면서 흑백영화 같던 첸나이가 활기를 되찾았다. 고작 삼사일이었는데 마치 서너달은 지난 듯했다. 전화도 인터넷도 원활하지 않은데, 그나마 꼭대기 층이었던 우리집은 간간히 전화와 인터넷 연결이 가능했다. 한국 뉴스에 첸나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연락도 들어왔다. 100년 만의 폭우라니. 공항이 물에 잠겨, 겨울 한국행도 모두 취소가 되고 모든 회사도, 집도, 학교도 비상이었다. 원상복귀를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비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한국분들도 꽤 있었고, 지금은 첸나이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을 만나면 추억처럼 이야기하는 일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긴장되고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그나마 우리가 살던 지역은 저지대가 아니고 바다가 근처에 있어 물이 잘 빠진 덕분에, 골목골목 크게 물이 잠기지도 않았고, 상점들을 이용하는데도 큰 무리는 없었다. 다만 기사나 메이드와 같이 사는 곳이 좋지 않은 집들은 물이 잠겨 살림살이를 건져내고 물을 빼느라 며칠 더 고생을 했다. 그 와중에도 마담과 아이들 걱정을 하며 매일같이 물길을 헤치고 우리집을 찾아 정보를 업데이트해주고 차를 살펴보고 필요한 물자를 구해다주던 기사가 있었기에, 남편이 출근한 동안에도 한층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일은 많지만, 의지할 곳은 딱히 많지 않았던 타지 생활인 만큼, 한국 사람들끼리 더욱 돈독해지고, 그 4년이란 긴 시간을 변함없이 함께 해준 우리 기사에게도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인도 생활을 하는 내내 느끼던 감정이지만, 인도는 빈부격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사라진 계급이라는 것도 여전히 실재하고 있었기에,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이런 차이로 인해 평생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에 휩싸이곤 했다. 없는 자들의 불편함과 억울함,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며 맑은 눈망울로 씨익 웃어보이곤 했던 그들의 삶.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던 있는 자들의 일상과, 같은 사람을 벌레 취급하며 들었다 놨다 하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역겨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을 쳇바퀴 안에서 구해낼 길은 없었고, 어줍잖게 돕겠다고 나섰던 일들은 사실 알고 보면 정작 그들을 위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그 당시, 인도 춤의 하나인 발리우드와 컬리우드 댄스를 배우던 젊은 댄스 선생님, 지금은 나의 인도 친구가 된 수비 덕분에, 삶의 최하층에 사는 이들을 작게나마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최고층이나 갑부가 아니었던 수비는, 정부의 구호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이들을 위해 모금을 마련하고 이 모금으로 그들의 실행활에 필요했던 쌀과 우유 가루, 기저기, 생리대와 같은 필수품들을 사서 봉투마다 물건들을 담아 가난한 이들의 집집마다 그 봉투를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당시에 그 동네에는 물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나는 주변 사람들과 모금을 모아 수비에게 전달해주고, 흔쾌히 내 차를 이용하여(정확하게 말하면 회사에서 사용하도록 해준 차였다) 물품을 집집마다 전달해주는데 성공했다.


그 작은 봉투를 받아들며 '난드리'(고맙습니다의 타밀어)를 외치며 내 손을 잡으려고 애썼던 그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다. 첸나이 첫해에 겪었던 큰 자연재해, 100년만의 홍수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수많은 감정들과 수많은 단상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인도라는 곳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시리도록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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