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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크리스마스와 12월의 태풍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감흥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었다. 반팔에, 땀을 흘리며, 쨍쨍한 햇살과 무더위 속에서 맞는 12월이라니,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라니!


크리스마스라고 호텔과 큰 상점들이 단장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어 세우고, 상점마다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가득하다. 아무리 그래도, 무더운 여름에 반팔을 입고 맞는 크리스마스는 영 기분이 나질 않는다. 크리스마스는 추워야 제맛이라는 것을, 남인도에서 지내는 4년 내내 확실히 깨달았다.


타밀나두의 신격이었던 주지사 자얄리따가 타계한 이후 온갖 정치적 공작과 음모가 난무했던,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웠던, 무척 겁이 나고 무서웠던 시기였던 터라 그 와중에 크리스마스는 한 줄기 희망의 빛과 같았달까. 그리고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환상과 같으니까. 상점에서 인도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몇 가지 골라 사고, 창고에 잠들어 있던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꺼내어 집을 꾸며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정말 재미가 없다. 그래도, 아메리칸 스쿨에서 있을 크리스마스 캐롤 행사와, 미국식의 크리스마스 점등식이 있어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인지. 작년 겨울에 100년만의 홍수를 겪고 설마 올해는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이클론이 첸나이를 관통한다는 게 아닌가. 덕분에 크리스마스 행사는 전부 취소가 되고, 학교 방학이 당겨졌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싶으면서도, 무섭게 내리는 비를 헤치고 물과 생필품을 사다 날랐다. 지난 겨울에 겪었던 홍수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기우가 아니었다. 사이클론이 첸나이에 접근하면서 굵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괴이한 소리를 내며 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로의 나무가 부러지거나 뿌리 뽑혔다. 가로등과 전선도 난리이고 아직 사이클론이 샹륙도 하기 전인데 베란다 유리창이 너무나 무섭게 흔들려 곧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이런 비바람은 처음 보는 듯했다. 사이클론이 상륙하면서 첸나이 시내의 건물 지붕이 날아가고, 하얏트 호텔의 외벽이 다 떨어져 나갈 만큼의 엄청난 바람이 불어댔다. 아이들과 덜덜 떨며 비바람이 잦아들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짧다 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몇 일, 아니 몇 달과도 같았던 악몽 같던 그 몇 시간으로 첸나이는 초토화가 되었다. 온 도시에 나무가 부러져 정글과도 같았고 인터넷과 전기는 돌아오기까지 몇 주가 걸렸던 듯하다. 유리창이 깨져 집안에 비바람이 들이쳤다는 집도 있었고, 사이클론으로 큰 피해를 입은 한국 교민들도 제법 있었다. 지난 겨울에 이어 이번 겨울까지, 연달아 있었던 자연 재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과 공포를 남겨주었다.


그 뒤로도 2년간, 겨울에 비가 내리거나 사이클론 소식이 들리면 귀를 쫑긋 세우고 민감하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악몽과도 같았던 두 해의 겨울을 보낸 후, 맑고 쨍한 크리스마스에 크게 감사하게 되었다. 눈이 오지 않아도 좋고, 더워도 좋았다. 그저 평소와 같기만 하다면야. 다행히 진짜 크리스마스 이전에 많은 것들이 정상화되었고, 학교의 크리스마스 행사와 점등식이 취소된 아쉬움을 달래며,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 인도 첸나이에 있는 동안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한국에서 맞는 추운 크리스마스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일이란 것을 40인생이 지나고 난 후에야 알게 되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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