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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오라 Mar 16. 2022

아이의 생일. 두 번째 나이가 시작된다.


'어? 뭐지? 혹시??'


불안한 마음에 화장실로 들어가 확인해보니 속옷이 축축했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어기적 어기적 불편한 걸음걸이로 신랑을 깨우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자기야! 빨리 일어나, 나 양수 터졌어. 병원 서두르자. 얼른 일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신랑은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양수가 터진 것을 보니 '오늘 출산하겠구나' 100미터 달리기 결승점을 통과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외출 준비를 한 뒤 식탁에 앉아 신랑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가만있어보자. 분만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밥 먹을 시간은 안 될 것 같고, 어쩌지'


그때 마침 식탁 위에 있던 노란색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라도 먹고 가자'

잽싸게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 껍질을 벗겨낸 뒤 한 입 베어 물고 오물오물거렸다. 오물대는 모습에서 비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잘 익어서 일까. 이 와중에 바나나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바지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양수임을 알아차렸다. 다급해진 마음을 붙잡고 빨리 가자며 신랑을 재촉했다. 예정일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마침 병원에 가보려고 했던 날이었다. 미리 싸놓은 분만 가방을 챙겨 서둘러 집을 나와 차에 탔다. 그 사이 양수는 더 흘러내려 바지며 속옷을 흠뻑 적셨다. 갈아입었는데도 양수가 꽤 흘렀던 모양이다. 초조함과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직 진료 시간이 되지 않은 이른 아침. 곧바로 분반실로 향했다. 데스크에 계신 당직 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다행히도 담당 선생님이 당직이라 지금 계신다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선생님을 기다렸다. 신랑도 초조한 지 내 손을 꼭 잡았다.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인사를 건넨 뒤 내진을 하셨다.

 

"엄마, 입고 온 속옷 어딨어요?"


갑자기 묻는 속옷의 존재에 신랑이 가방을 살펴 꺼내 드렸다. 속옷을 살피던 눈이 멈춰지고


 "이것 봐요~ 아이가 똥을 쌌네, 산모교실에서 들었죠? 뱃속 태아가 태변 잘못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응급 수술해야겠는데" 신랑과 나에게 태변의 흔적을 보여 주며 물으셨다.


"아침일찍이니 밥 안 먹고 왔죠?"

"어, 아이 낳을 것 같아 힘써야 하니 바나나 먹고 왔는데요...."


쎄~한 기분에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불안한 마음은 왜 빗겨가질 않는 걸까.


"수술하려면 금식해야 하는데, 바나나 하나 먹었죠? 그럼, 음.... 30분만 있다 수술합시다"


'아뿔싸! 자연분만에 힘 좀 써보겠다고 급하게 챙겨 먹은 바나나, 이게 발목을 잡다니. 그 사이 아이는 괜찮겠지?'


불안한 마음을 신랑에게 토로하며 바나나는 왜 먹은 건지 자책하는 말을 쏟아내니 우리 아이는 씩씩하니 괜찮을 거라며 다독여 주었다. 본인도 걱정됐을 텐데 든든했다. 시간이 흘러 수술실로 들어갔고 순식간에 진행됐다.


2005년 3월 16일, 오전 9시 36분.


우리 아이는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았다.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사롭지 않은 골반크기에 주변 사람 모두 힘들이지 않고 자연분만할 거라며 입을 모았는데 수술 소식을 전하니 황당해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태변은 쌌지만 건강하게 태어났고 지금까지 잔병치례는 있었지만 큰 사건사고 없이 건강하게 자라준 큰 아들. 간첩도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중2를 거쳐 중3이 되었다. 아빠보다 더 커버린 아이지만 여전히 나에겐 아이 같다. 반면에 듬직하고 든든하다. 아들이어서가 아니다. 아이의 성품과 성향이 엄마인 나를 기대게 만들고 말하지 않아도 힘이 될 때가 있다. 


16살인 된 아이, 부모라는 직함을 받은 지 16년이 되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아이도 태어났으니 경력은 늘어난 셈이다. 경험도 쌓였고 요령도 생겼다. 하지만 부모라는 역할은 경력이 쌓이고 경험치가 쌓였다고 현장에서 수월해지는 것이 아니다. 편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마다 각자의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다. 참고는 할 수 있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건 어렵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첫째 엄마로서의 나이는 16살, 둘째 엄마로서의 나이는 14살, 셋째 엄마로서는 8살, 이렇게 각자의 나이를 부여해주고 싶다.

아이들도 매일이 새로운 날이고 경험해보지 않은 날이듯 엄마도 그렇다. 부모가 처음이라 낯설었고 어색했고 서툴렀다. 둘째니깐 첫째의 경험이 있으니 잘할 수 있겠지.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가던 둘째의 육아.


"이미 둘을 키웠으니 거저 키우겠네~, 위에 애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셋째가 태어나자 주변에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역시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착각이었다.


가족 중 고구마 케이크를 즐겨하는 사람이 없어 1년에 딱 한번 고구마 케이크를 마음껏 먹는 생일날을 기다리는 아이. 가끔씩 사줄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조각 케이크이라 양에 차질 않는다고. 평소 늦게 들어오는 아빠가 갑자기 퇴근했다는 전화에 저녁밥을 먹고 나서야 케이크를 사러 나갔다. 혹시나 고구마 케이크가 없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는데 두 번째 간 매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온 가족이 모여 케이크에 초를 켜고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 연신 맛있다며 고구마 케이크를 먹는 모습에 행복이 묻어났다.



아침에 막 끓인 미역국을 먹여주고 싶어 미역을 꺼내니 아침에도 케이크 먹고 싶다며 저녁에 끓여달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미역부터 꺼내 볼에 담갔다. 문득 시계를 보니 9시 36분이 되어간다. 전신 마취한 수술이었기에 아이가 태어난 시간엔 기억도 없고 막 태어난 아이 얼굴도 모르지만 16년 전 아이가 막 느꼈을 세상은 어땠을까... 나는 또 어떤 심정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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