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A Oct 21. 2021

식감, 살려는 드릴게.

홈메이드 콩나물밥





학창 시절,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는 점심메뉴 분석하기였다. 교실 앞 칠판 한 귀퉁이엔, 한 주간의 식단표를 가지런히 붙여놓은 게시판이 있었는데, 매일 오전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그 앞은 '오늘 점심은 뭐냐'며 궁금해하는 인파들로 늘 북새통을 이뤘다. 그 시절 밥 먹는 시간은 화장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학업과 관계없이 교실 밖을 자유롭게 나설 수 있는 비상구 같은 존재였으니, 한창 자라나는 새싹들에겐 퍽 중요한 일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비상구에도 '삐용 삐용' 비상이 걸릴 때가 있었다. 그 비상벨이 울리던 날은 바로, '콩나물밥'이 점심메뉴로 나오는 날이었다. 그땐 왜 그렇게 콩나물밥이 싫었을까? 학교 급식실에서 만들어주던 콩나물밥은 유난히도 밥은 질척이고 콩나물도 맥없이 축축 쳐져 콩나물 대가리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_-..) 날 바라보고 있기 일쑤였다. 어떨 땐 무를 가늘게 채 썰어 콩나물과 같이 넣어 지은 밥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날은 친구들 사이에서 레벨 '상'급의 비상벨이 울리는 날이었다. 콩나물과 무 특유의 비릿함과 알싸함이 밥 속 깊이 배어든 콩나물 + 무밥은 그야말로 어린 학생들에게는 인생의 깊이만큼이나 깊이가 있는 그 참맛을 이해하기엔 어렵기만 한 고 난이도 메뉴였나 보다.      


대학시절을 보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점심시간은 여전히 소중했다. 아니 어찌 된 게, 모든 식당들은 단체로 메뉴를 짜고 만들기라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대학시절 기숙사 식당에서도, 회사 구내식당 점심메뉴로도 그 녀석은 꽤 자주 등장했다. 그나마 한 가지 업그레이드되었던 건 가끔 돼지고기인지 콩고기인지 모를, 아무튼간에 고기로 추정(?)되는 단백질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그 역시도 밥, 콩나물과 함께 고온에서 장시간 찜질을 하고 나온 탓에, 고기라는 녀석의 촉촉하다 못해 축축해진 몸뚱이에선 가끔 그만의 smell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오후 3시쯤 어김없이 밀려오는 폭풍 허기를 반쯤 달래 놓기 위해선 뭐든 먹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양념장의 성의를 봐서라도 한 숟가락 듬뿍 넣고 비벼 양념 맛으로라도 애써 먹어치웠었다.             


시간이 흐른 뒤, 콩나물밥과 나의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문득, 콩나물이 담긴 봉지가 눈에 띄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이었을까. 순간 콩나물밥이 뇌리를 -파바박- 스치고 지나갔다. 결코 그 녀석과는 좋은 기억이 없었는데 갑자기 궁금해져 버린 것이다.. 그 녀석의 맛이. 왜인지 모르게 그리워졌다. 동시에 다짐했다. 이 그리움으로 인한 콩나물밥과의 우연을 가장한 재회가, 영원한 헤어짐의 순간이 되지 않으려면 이번만큼은 촉촉? 아니 축축함 없이 아삭한 식감을 품은 콩나물밥으로 만들어 먹어야겠다 싶었다. 

"까짓거 식감, 살려는 드릴게."       




[위대(胃大)한 2인분 or 위소(胃小)한 3인분 기준]

* 재료: 밥 2인분, 콩나물 세 줌 (약 200g-300g), 물 2T, 맛술 1T, 참기름 2T, 다진 돼지고기 (200g). 
* 돼지고기 양념: 다진 마늘 1/2T, 후추 1/3t, 소금 1/3t, 생강가루 한 꼬집, 맛술 1.5t, 진간장 1t.
* 비빔 양념장 재료: 다진 마늘 1T, 다진 땡초 1개, 고춧가루 1T, 다진 대파 한뿌리, 양조간장 1T, 국간장 3T, 맛술 1T, 식초 1T, 설탕 1T, 매실액 1T, 통깨 1T, 참기름 1T.


1. 냄비/웍에 콩나물을 깔아준 뒤, 물 2T + 맛술 1T + 참기름 2T를 넣어준다.


(*콩나물의 양을 늘릴수록 콩나물에서도 수분이 나오기 때문에, 넣어주는 물의 양은 콩나물의 양을 봐가며 조금씩 줄여서 넣어주는 게 좋다.)

2. 그 위에 밥을 펼쳐 올려준다.

3. 뚜껑을 닫고 중불에서 4-5분 뒤 (콩나물 냄새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약불로 줄여 4-5분간 쪄준다.


(*콩나물 냄새가 사라진 뒤, 냄비 속 수분이 졸아들 때까지만 약불에서 쪄주고 [뚜껑 닫은 채로], 이후 수분이 잘 졸아들지 않으면 뚜껑을 열어 밥과 콩나물을 주걱으로 살짝 덖어주면 수분이 날아간다.)

4. 비빔 양념장을 만든다.

(*고춧가루나 땡초의 양은 매운 걸 좋아하는 취향에 따라 덜 넣거나 추가해줘도 좋다.)

5. 올리브유 1T를 두른 웍에, 다진 돼지고기와 다진 마늘 1/2T, 후추 1/3t, 소금 1/3t, 생강가루 한 꼬집, 맛술 1.5t를 넣고 볶아준다. 

6. 고기가 절반쯤 노릇해졌다면, 진간장 1t를 웍 한쪽 귀퉁이에 기울여 담아 살짝 끓여내 불맛을 입혀준다음 고기와 같이 노릇하게 볶아준다. 








밥솥에 쌀과 고기, 콩나물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밥을 지으면 간단하겠지만, 그로 인해 콩나물이 가진 수분을 강제로 희생시켜 밥과 고기의 생기를 잃게 하고 콩나물은 지쳐 흐느적거리는 꼴을 또다시 볼 순 없었다. 해서, 고명 따로 밥 따로 만들어 섞어 먹기로 했다. 다진 돼지고기로 볶음밥을 해 먹던 가락을 떠올려, 간장으로 불맛을 살짝 입혀 노릇하게 구워내 미리 고명을 만들어둔다. 콩나물밥은 밥알에 콩나물의 향이 은근히 배어들도록, 지난날 어깨너머로 배운 엄마의 아삭한 콩나물 무침을 만들 듯이 살짝만 같이 쪄보기로 했다. 콩나물의 아삭한 식감과 고소한 향을 덮은 밥알의 생기가 살아있는 콩나물밥은 한입 먹자마자 진실의 미간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건 리얼로 맛있다는 뜻이다. 과거 콩나물밥의 맛이 입력된 머릿속 파일이 'Shift + Delete' 버튼을 누른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다. 축축했던 고기 대신 은은한 불향을 입어 노릇하게 구워진 돼지고기 고명이 콩나물밥에 올려져 함께 어우러지는 순간, 녀석의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다. 이번만큼은 양념장 맛으로 먹는 콩나물밥이 아니라, 양념장은 그저 거들뿐 콩나물과 밥, 고기의 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조력자 역할을 해준 셈이다.


누누이 이야기 하지만 콩나물밥은 맛있는 녀석이었다. 그 사실을 서른의 중반이 된 이제야 깨달았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었던 것인가. 영양을 고려해 만들지만 많은 인원을 품기 위한 요리 방식이 주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미처 철이 들지 못했던 내 얕은 입맛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그 맛을 온전히 즐기며 먹어볼 셈이다. 식감 그 녀석, 살려줬더니 크게 보답하네.    


식감을 살려준 은혜를 단단히 갚은 콩나물밥.






Bona가 준비한 오늘의 요리, Bon appétit [보나베띠]: 맛있게 드세요. 

이전 09화 이럴 '빠에야', 난 '리조또'를 먹겠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