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은 평소와 달리 특별하게 보냈다. 친정 엄마의 역귀성으로 다 같이 서울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막내 동생의 이사와 엄마의 병원 정기 검진이 있었다. 시골에서 닭장 플렉스를 실현한 아빠는 이번만큼은 홀로 집에서 닭을 돌보며 지내겠다고 쿨하게 선언하셨다.
엄마는 보름 동안 머물며 차례로 딸들 집을 방문하셨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각자의 사정에 맞게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표현대로 ‘커리어 우먼’인 딸은 집밥보다 외식으로 밥상의 정을 나누었고, 백일 아기를 키우는 동생네에서는 조카를 포함해 아이 여섯을 키운 노련한 양육 스킬로 손주를 돌봐주었다. 엄마는 보름 동안 손주를 돌보는 대모가 되기도 했고 딸들의 엄마로서 딸들이 바치는 밥상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위해 한 가지 유의미한 선물을 했다. 평소에도 흥이 많은 엄마를 위해 뮤지컬 공연을 함께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엄마는 늦잠을 자는 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먼지떨이개를 집어 들고 집안 곳곳을 털었는데 신이 난 듯 약간 들뜬 엄마의 모습 뒤로 비틀스, 아바, 비지스, 퀸이 부른 70년대 올드팝송이 bgm처럼 깔렸다.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큰 가전제품은 인켈에서 나온 전축 풀 세트였고 아침부터 전축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청소가 어서 끝나기만 기다렸다. 내가 기억하는 올드팝송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무렵의 차가운 아침 공기가 늘 따라다녔다.
엄마는 동네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딸의 결혼식에 직접 축가를 부를 정도로 노래를 즐겨했고 좋아했다. <맘마미아> 뮤지컬도 분명 엄마의 취향에 딱 맞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처음 보는 공연을 엄마가 끝까지 집중력 있게 보실까 염려되기도 했다. 엄마는 난생처음 보는 뮤지컬에 조금은 설레는 눈치였다. 혹시라도 공연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춤이라도 추면 어떡하냐라는 난처한 질문으로 나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엄마는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므로.
이윽고 배우들의 열연이 시작되고 귀에 익은 노래가 흐르고 스토리가 중반부를 넘어갈수록 엄마는 공연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 손을 턱에 괴고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에 혹시 졸고 계신 걸까 곁눈질로 몇 번 확인했지만 엄마는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훌륭한 감상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미션이 시작되자마자 엄마는 1부 감상평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재미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셨다.
스토리가 무르익고 절정을 향해 가며 내 귀에는 엄마의 허밍 소리도 따라 들렸다. 엄마의 어깨가 조금씩 움직이는 걸 보니 엄마가 흥이 났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차하면 일어나 몸이라도 흔들 심산 같았는데 그래도 이따금 배우들이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며 박수를 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에 엄마는 신나게 박수를 치며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아직 여운이 남아 있을 때 커튼콜로 등장한 배우들이 아바의 명곡을 열창하며 급기야 앞줄에서부터 관객들이 차례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엄마는 재빠르게 일어났고 무대 위의 배우라도 된 양 신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안무를 따라 하며 팔을 흔드는 엄마는 세상 가장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공연이 끝나고 퇴장하는 내내 웃음을 그치지 못했고 이렇게 재미있는 걸 처음 본 게 아쉬울 정도라고 했다.
공연장 밖으로 나와보니 맑은 밤하늘에 둥그런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아직 흥이 가라앉지 않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라고. 나는 엄마에게 새로운 꿈 하나를 심어준 딸이 되었다. 그리고 노란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었다. 엄마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