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하루
야외 테니스장에서 우리끼리 연습을 마치고 다시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갔다. 연습 내용이 좋지 않아 조금은 걱정이 됐다. 게다가 남편은 공만 던져주느라 포핸드, 백핸드 스트로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선생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한 명씩 코트 가운데 세우고 포핸드와 백핸드 스트로크를 차례로 할 수 있게 공을 던져주었다. 이때 랠리가 될 수 있도록 네트 너머로 잘 쳐보라고 했다. 역시나 남편을 앞세웠다. 남편은 제법 공을 맞혔고 가끔 선생님과 랠리를 하기도 했다. 백핸드도 곧잘 했다. 약간 과장해 남편은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빠르게 뛰어다녔다. 선생님은 그런 남편을 보며 좀 더 주의해야 하는 부분, 교정해야 하는 부분을 일러주며 일대일 레슨을 이어갔다. 뒤이어 나의 차례가 되었다. 매주마다 만나는 선생님인데 꼭 이 자리에 서면 불쑥 긴장감이 솟았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나 역시 좌우로 뛰며 공을 맞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낮에 있었던 연습도 설렁설렁하지 않았던가. 비축해 둔 체력을 모두 쏟아부을 듯 열심히 뛰었다. 내가 뛸수록 선생님의 가르침은 자꾸 늘어갔고 공은 네트가 아닌 천장으로 향했다. 분명 나는 치타처럼 뛰었는데 나를 보고 있던 남편이나 선생님 모두 나를 달팽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30년 전, 나는 운동장 조회대 앞에 같은 반 아이들과 다섯 명씩 조를 이뤄 나란히 섰다. 가을 하늘 아래 만국기가 펄럭이고 여기저기 피어나는 모래바람과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했던 운동회 날이었다. 종이 인형이었던 나는 또래보다 가는 몸피와 구릿빛 피부로 늘 견제 대상이었다.
“너 달리기 잘하지?”
“아니.”
조용하고 내향적이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열이면 열 아니라고 했지만 친구들은 으레 겸손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하나, 둘셋 구호와 함께 신호총소리가 들리면 눈앞의 100미터를 빠르게 뛰어야 하는 달리기 시합이었다. 1등부터 3등까지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고 등수대로 열을 맞추어 앉으면 끝이다. 나는 매번 달리기 시합에서 꼴찌를 놓치지 않았다. 아주 이따금 꼴찌 자리를 뺏길 때도 있었는데 그래봐야 간신히 한 발 차이로 꼴찌를 내주어야 했다.
복작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를 지켜보던 엄마는 땅이 꺼질까, 하늘이 무너질까 어쩜 그렇게 살살 뛰고 있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최선을 다해 뛰었지만 언제나 느렸다. 저 멀리 앞서가는 친구의 등을 바라보며 다리를 더 빠르게 굴려보지만 나의 기록은 단 1초도 줄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내를 두고 남편 혼자 연습했냐며 멋쩍게 말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민첩하고 재빠르게 스텝을 해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남편은 빠른 발놀림으로 선생님의 칭찬을 독점했다. 남편은 칭찬에 힘입어 날아갈 기세로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물 먹은 빨래 짜듯 얼굴에서 땀이 뚝뚝 흘렀다.
테니스 연습장을 나서며 문 앞에 있던 전신 거울에 그와 나의 모습이 비쳤다. 남편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보송보송한 얼굴이 대비되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와 나의 속도 차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