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는 ‘보호자’를 만났다. 우연이었다.
산책 중 목이 말라 경로당에서 찬 물을 얻어 마셨다. 숯댕이가 그 물을 핥는 순간, 그 옆을 지나가던 트럭에서 한 중년 남성이 내렸다. 그는 우리와 함께 있는 앵두를 알아봤다. 앵두의 본명은 ‘보름이‘라고 했다. 그는 앵두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나를 짓누르던 바위가 내려가고 나는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다.
앵두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여 그 곁에 누웠다. 숯댕이는 앵두의 밥을 조금 뺏어 먹었다. 친구 집에 놀러 온 숯댕이는 여전히 산만했다.
그것으로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만, 역시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내린 결론은, 그 보호자는 앵두를 버거워했다. 누군가 데려가주길 바랐다. 앵두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다.
그래서 그는 ‘들개’로 살아갈 수 있었다.
‘소유자’의 무관심이 앵두에게 자유가 된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게 앵두는 다시 돌아왔다. 그의 삶에 두 번째 ‘소유자’의 공간으로. 첫 번째 소유자의 집보다는 나은 환경임에 틀림없지만 앵두에겐 조건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앵두와 산책을 할 때면 그는 평평한 포장도로를 천천히 걷는다. 나와 보폭을 맞춰 걸어주는 앵두다. 하지만 그건 길의 문제였다. 앵두는 산으로 들어가면 달라졌다. 빠르고, 힘이 세고, 자기주장을 확고하게 드러냈다. 나는 그에게 끌려 다니느라 거미줄을 20채는 부순 것 같았다. 산에서 늑대를 본 적 없지만, 앵두는 늑대처럼 보였다.
며칠 전 밤, 그가 흙 속에서 뜯고 있던 것이 밤송이가 아니라 야생 고슴도치라는 것을 알고 뜨악했을 때도, 나는 앵두가 인간이 정한 규칙에 순응하며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경사가 가파른 산을 무지막지하게 쏘다니는 앵두.
묶인 채 ‘보호자’가 떠다 준 물이 아닌, 산 어딘가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마시는 앵두. 나도 같이 물을 마셨다.
두 번째 보호자가 앵두에게 내건 조건은 이렇다. 기존에 있는 개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고, ’사냥‘이 금지되었다. ‘동물들은 다들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 두 번째 보호자의 룰이었다. 앵두는 그의 포식자성을 버려야 살 수 있다.
앵두가 두 번째 보호자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산다면 그는 결국 주민들의 민원으로 포획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어딘가로 팔려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가축화된 동물, 인간의 소유물로만 여겨지는 동물 종은 이 땅에서 홈리스로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