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이와 있다가 계엄 소식을 들었다. 이게 뭐여.
집으로 가면서 든 생각은, 돌봄에 차질이 생길까 하는 것이었다. 활동가들은 분노했고, 단톡과 텔레그램에서 정보들이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돈가’가 떨어질까 걱정했고, 엄마는 체육센터가 문을 닫아 좋아하는 수영 강습을 못 가는 것인가 걱정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국회로 갈 수 있는 이동권이 확보된 사람-차가 있거나, 비싼 택시비를 지불하고서라도 갈 수 있거나, 이동이 가능한 정신/신체 상태이거나, 서울에 거주지가 있던 이들은 그곳으로 가서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알리고, 분노할 수 있었다.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서울에서 자행되었고, 그것을 해제하는 일도 서울에서 일어났다. 그곳만 다른 나라 같았다. 시민단체와 정당들은 앞다투어 성명서를 통해 이 계엄령이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지를 규탄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그 말들이 멋졌다. 그러나 외로웠다.
언제나 당연하게 모든 걸 통제받는, 권리가 없는 이들을 매일 만난다. 작업실로 가는 길엔 늘 횟집 수조를 지나야 하고, 이제는 깊은 관계를 맺어 분리되기 어려운 존재들의 억압을 혼자 목격하고, 삭이는 일상. 이 권리 침해는 국민적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외롭다.
깨끗한 물도 마시지 못하고, 먹고 싶은 만큼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가고 싶은 방향이나 거리를 정할 수도 없다.
다섯 시간씩 들여 오가는 것은 다섯 시간만큼 내 자유를 소극적으로 억압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곤하고,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그 순간들이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이다.
나의 생득권과 그들의 것은 너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