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음, 할 수 없음

by 봉봉오리


과거, 숯댕이에게 간식을 주고, 장난을 치는 것은 하루종일 묶여 있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 날, “보호자가 숯댕이 산책을 시켜도 된다고 했다. “는 말을 듣고 첫 산책을 했다.


그전엔 그저 묶여 있던 개가, 이제는 산책할 수 있고, 내가 하지 않으면 그대로 묶여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그를 만나러 가던 것이 점점 촘촘해졌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너무나 큰 차이다.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럼 나의 일상은 훨씬 평온했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시골 마을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일 대신, 주기적으로 방을 청소하고, 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한 번씩 요가를 하며 나를 돌보는 것을 계속 해왔을지도 모른다.


돌보는 동물이 늘어갈수록, 방은 지저분해진다. 방바닥이 물건으로 다 덮일 즈음, 몇 시간 반짝 치우는 것이 전부다. 평소엔 그럴 에너지가 없어 그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는 것이 끝이다. 아이고 무릎이야.






산책이 끝나갈 즈음 들르는 곳이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시는 곳이다. 수질은 모르겠고, 맛은 좋다.



이곳에서 물을 마시면 마주치는 눈이 있다.



갈색 털의 마른 체구. 과묵한 개가 우리를 쳐다본다. 그는 산책하는 숯댕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했다.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눈에 밟혔던 그 개에게 다가가 보기로 했다. 밥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사료와 간식을 담은 봉지를 들고 숯댕이와 함께 다가가자 그 개는 짖지도 않고, 그저 주눅 들었다. 숯댕이가 흥분해서 잠시 하네스 줄을 옆 나무에 묶어두고 혼자 다가갔다.



흩날리는 눈발. 텅 빈 밥그릇. 꽁꽁 언 물그릇.


가져온 사료와 간식을 그릇에 와르르 쏟아부었다. 스테인리스 그릇을 들고 아래로 내려가 흐르는 물을 퍼왔다. 2m 남짓 거리에 이렇게 맛있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개에겐 언 물그릇만 있었다.



줄은 짧았다. 1m 남짓의 줄. 쌓여 있는 똥. 보통의 마당개였다. 내가 참을 수 없어서 산책을 하는 숯댕이는 사실 이 동네에서 꽤 ‘괜찮은’ 환경에 사는 편이다. 와이어 줄로 인해 숯댕이는 약 10m의 행동반경이 허용된다.


이 동네의 개들은 집보다 다른 것을 지킨다. 공장이나 농막을. 그렇다는 것은 보호자가 매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근하지 않는 보호자. 밥도 물도 없이 방치된 개.






개에게 밥과 물을 주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다. 돼지, 닭, 소, 물살이에겐 그럴 수 없다. (살찌워 팔아야 하니 굶기지 않겠지만) 산책도 그렇다.


돌봄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종이 있다. 남의 ‘재산’인 마당개를 돌보는 것은 이 동네에서 ‘선행’ 취급을 받지만, 축사에 들어가 ‘가축’을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개를 지나쳐 산으로 향했다. 최근부터 숯댕이와 산책하기 시작한 구간이다.




이곳에서 만난 들개는 앵두를 닮았다. 그는 숯댕이와 곧잘 어울렸고, 숯댕이는 그의 공간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그물이 둘러쳐 있는 그 공간은 작은 텃밭과 낡은 시설들이 있는 보통의 방치된 시골 풍경이었다. 찝찝한 것은, 그 안에서 들려오던 개의 목소리였다. 사람이 관리하는 것 같지 않은 공간인데, 왜 개의 목소리만 들릴까. 들개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않고.



무시하고 싶었는데, 뭔가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들개가 출산이라도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물 아래로 꼬물꼬물 기어갔다. 개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 가까이 갔다.


밥그릇의 색이 화려했다. 음식쓰레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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