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
숯댕이와의 두 시간 산책, 꿀비 새나 보담 셋의 산책 후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공원에 갔다.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아침부터 부랴부랴 일정을 처리했던 하루였다. 온몸에는 땀 냄새에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
매일 밤 겨울 집에서 얼굴을 쏙 내밀어주었던 고양이들은 봄이 되고부터 바빠졌다. 얼굴을 보기 영 어렵다. 그나마 가장 자주 얼굴을 보여주는 하양이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하양이 못 보고 가는 건가 싶던 때, 사람 두 명이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이런 경우 근거리에 고양이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하양이었다. 그러나 뭔가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이 나눈 짧은 대화에 “아기새”라는 단어가 있었다.
새를 죽였나? 설마.
잠시 후 다가간 곳은 처참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총 다섯 명의 새 사체가 있었다. 내가 그들을 살피는 동안 하양이는 그중 한 명을 입에 물었다. 바로 옆에 있는 높은 소나무에서 둥지가 떨어진 것 같았다. 떨어진 새들을 하양이가 물어 죽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사체와 함께 꽤 큰 깃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엄마 새의 것이었을까.
아까의 두 사람은 살아남은 유일한 새가 하양이에게 공격당할까 작은 나무 위에 올려두었다고 했다. 그 새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이미 물린 상처가 있었고, 나무에서 곧 떨어지면 또 물릴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했다. 정말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주민 분은 (하양이를 가리켜) 일행에게 “애슐리하고 있었네.”라고 말했다.
이 새가 무슨 새인지도 모르는데…..
꼬질꼬질한 남방 주머니 안에 새를 넣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 사체들을 그대로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체에 여러 생명체가 몰려와서 먹고 분해하여 ‘자연스럽게’ 흙으로 다시 돌아가게 둘 상황이 아니었다.
여긴 엄연히 ‘인간들의 공간’이니까. 당장 날이 밝으면 이 공원을 가득 메울 다양한 인간들이 떠올랐다. 새의 사체와 깃털을 보고 누군가는 고양이 혐오의 근거로 쓸 것이었다. 거 봐라. 고양이는 새를 해친다. 이것 봐라. 얼마나 안 됐냐. 투명벽에 부딪혀 죽는 새든, 매일같이 공장에서 죽는 새든 알 바 아니더라도, 고양이가 새를 물어 죽이는 것은 못 참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까.
이 ‘현장’을 없애야 했다. ‘범인’을 위해 현장을 깨끗하게 만드는 조력자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죽인 거야. 먹지도 않을 거면서.
새의 사체를 옮겨 땅을 팠다. 워낙 작은 사체라 한 손으로 몇 번 파니 충분했다. 다섯을 함께 묻었다. 그 와중에 하양이가 곁에 다가왔다. 흠칫했다. 안 돼.
하양이는 내 행동이 이상했을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을 왜 먹지 않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섯의 사체 위로 낙엽을 덮고 작은 돌을 얹었다. 기시감이 드는 일이었다. 새나가 탈출해 비닐하우스 안 닭을 물어 죽였던 날, 수건에 감싸 그를 묻으면서 느꼈던 기분 같았다. 파헤치지 마, 하양아.
남방 주머니 안에 있는 새는 한 번씩 소리를 내어 생존을 알렸다. 미안해요 이것까지만 하고 갈게요.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하루가 길다 못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깃털들을 주워 일부를 남방에 넣었다. 박스 안에 깔아주면 좀 나을까. 새에 대해 1도 모르는 내 짧은 생각으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나머지 깃털은 주변으로 ‘치웠다 ‘. 엄마 새의 행방은 묘연했다. 생존자인 이 새를 ‘납치’하는 것인지 ‘구조’하는 것인지는 (살아 있다면) 엄마 새만이 알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적당한 박스 하나에 남방과 깃털을 깔고 새를 올려놓았다.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이 밤을 버틸 수 있을까.
기절하듯 누웠다. 새벽 한 시 반.
몇 시간 후 잠에서 깼다. 팔에 엄청난 가려움증을 느껴서였다. 이것도 기시감이 든다. 오돌토돌 뭔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두드러기. 방을 뒤적거려 지난번 사둔 항히스타민제를 먹었다. 심란한 밤이었다.
아침이라 하기엔 늦은 시각.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새는 살아 있었다. 경기도 야생동물구조센터 연락이 닿았고, 늦은 오후에 집으로 오기로 했다.
다 해결 됐어!
센터에서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후련한 마음으로 상자를 안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상자를 살짝 열었는데 아무 미동도 없었다. 숨을 거둔 것이었다. 눈을 살짝 뜨고 입을 조금 벌린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가자 센터 직원 분이 다가오셨다. 새가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새를 살펴보더니 맞다고 했다.
데리고 가면 폐기 처분될 것 같아서 사체는 내가 하기로(묻기로) 했다. 상자를 안고 아파트 화단을 얕게 팠다. 엄마의 깃털들, 나름 버드피딩이라고 준비한 사과 조각과 곡물 조각들을 함께 묻었다. 한 입도 먹지 못하고 갔다. 그는 아마 밤 사이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서글펐다.
아침에 빠릿빠릿 일어나 구조센터에 연락했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 집 근처 동물 병원이 ‘반려 새‘를 치료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몇 시간 뒤 온다는 구조센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돌보는 동물의 포식행위는 감당하기 어렵다.
어째서일까.
앵두가 한 밤 중 산책에서 밤송이를 뜯어먹을 때, 그것이 고슴도치라는 걸 알아채고 소름 돋았던 기분, 한쪽 눈에 장애가 있고 병약해서 마음이 쓰였던 작은 닭을 앵두가 물어 죽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착잡함, 견사를 탈출한 새나가 비닐하우스 안의 닭을 물어 죽여(그 닭은 도살되지 않고 쭉 살아갈 닭이었다) 그를 묻어주며 느꼈던 죄책감, 하양이가 물어 죽인 여섯의 어린 새들을 묻으며 서글픈 마음.
그러나 사실 그 공격은 그들 본연의 행동이다. 포식과 포식은 연결된다. 하양이가 새들을 물었듯, 새들의 엄마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애벌레를 잡아와 먹였을 것이다. 어젯밤 아기 새의 먹이를 위해 조언을 구했을 때, 누군가가 애벌레를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엄마 새는 애벌레를 나뭇가지에 쳐서 기절시킨 후 먹이거나, 또는 머리를 떼어내고 먹이기도 한다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나의 문제일 뿐인데도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걸까? 내가 돌보는 동물이 ‘누구도 해치지 않는’, ‘착한’ 동물이길 바라는 마음일까. 돌보는 동물이 가진 어떤 특성들을 온전히 품지 못하는 못난 마음 같기도 하다. “내가 돌보는 동물은 내가 제공하는 음식만 먹고살아요!”
정작 공장식 축산의 부산물들로 그들을 돌보면서도. 심지어 내가 그동안 먹은/죽인 동물의 수는 더 많을 텐데도.
또한, 내가 돌보는 관계의 인간 동물들은 육식을 즐긴다. 병원에 입원한 아빠를 잘 찾아가지 못하는 부채감을 해결하기 위해 아빠를 잘 부탁한다며 간호사와 같은 병실 사람들에게 논비건 음식들을 뇌물로 바쳤다.
많은 종류의 돌봄은 통제를 동반한다. 돌보는 동물이 공격성을 덜 갖길 바라는 마음도 통제일 것이다. 산책 중에 만나는 개들이 서로 사이좋게 인사하길 바라고, 돌보는 고양이들끼리 영역 다툼을 하지 않길 바란다. 줄 풀린 숯댕이가 고라니를 보고 추격하지 않길 바란다. 새벽과 잔디가 서로에게 살갑기를, 그래서 분리되어 살아가지 않는 것을 바란다. (지금은 단념했다)
싸우지 마, 안 돼.
공격성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가 돌보는 동물의 어떤 면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뜻할지도 모른다.
먹이, 잠자리, 임신 여부, 사회적 관계를 통제하다 도덕성까지 관여하고 통제하고 싶은 것일까?
아기이고 약한 존재는 해치지 말았으면 좋겠어,라고. 그래야 내가 당신을 돌볼 때 덜 불편할 것 같아.
어렵다.
*늦은 밤 어린 새의 돌봄을 위해 조언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서툰 돌봄으로 우왕좌왕 했던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습니다. 새 가족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