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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Aug 05. 2020

식은땀으로 샤워하기.

(5) 고객과의 첫 전화통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신입사원의 첫여름도, 어느새 시간이 흘러 가을 문턱까지 오게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긴장감 가득했던 직장생활에도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과정은 늘 우당탕탕이지만 결과는 어찌어찌 업무를 하나하나 소화해나갔고, 그로부터 오는 작은 즐거움과 성취감도 느끼게 되었다. 팀원들과도 어느 정도 친해져서 사무실 분위기에도 잘 적응해나갔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고객 대응 업무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속해있던 품질팀은 기본적으로 품질관리와 고객만족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부서였는데, 나는 두 가지 목표 중에서도 고객만족 부분에 있어서 큰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해외파트 소속이었기에 당연히 언어적인 면에서의 부담감이 가장 컸는데, 이는 첫 고객사 내방 때의 망한 기억 때문이었다. '아, 언젠가 한 번은 고객이랑 직접 전화하면서 맞대고 업무를 해야 할 텐데…'라는 걱정이 점점 커져갔고, 이는 나 스스로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몸소 나서서 업무를 해치우기에 나는 너무 간이 작은 사람이었다.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  

 

"야, H. 사무실에서 니 목소리는 거의 안 들리더라? 맨날 O사원 중국어 하는 소리만 들리고?"


 여느 때와 같이 홀로 묵묵히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중에, QC팀의 K팀장님이 내 자릴 지나가시면서 한 마디 하셨다. 당시 내 자리는 교통의 요지. 2층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드나드는 출입문 바로 앞자리였고, 그런 교통의 요지에 있다 보니 모든 직원들이 내게 한 마디씩 하고 가곤 했다. 장난 섞인 안부부터 업무 요청, 상사에게 까인 하소연까지. K팀장님의 말도 그렇게 지나치는 수없이 많은 말 들 중 하나였고 어떠한 악의도 없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고객 대응 업무에 부담감이 있던 나는 부끄러움이 물밀듯이 몰려오면서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아… 그…. 해야죠…, 해야죠. 하하."

 

 어찌 대답할지 몰라서 유야무야 대충 넘기려 했는데, 사무실에 그 얘길 듣고 있었던 J책임님이 오셔서는 업무 지시를 하셨다. K팀장님의 그 말 때문은 아니었을 거고, 아마 J책임님도 언젠가 한 번은 내게 고객 대응 업무를 시키려고 생각은 해왔던 것 같다.

 

"H, 니 이따가 H사 담당자랑 통화 한번 해라."

"아…"

"할 수 있제? 간단한 거다, 간단한 거. 그냥 전화해가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는데 우리 쪽에서 확인이 안 된다, 확인 쫌 해달라, 뭐 이런 식으로."

"네, 한번 해보겠습니다."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동안 커질 대로 커진 부담감을 한 번은 해소해야 했다. A4용지 한 장을 꺼내서, 어떤 문의사항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를 중국어 단어로 써놓고, 혼자 중얼중얼 대며 연습하고 있었다.


"아, 아직 안 했나? 어렵나?"

"아뇨. 어려운 게 아니라, 내용 좀 정리해서 얘기할라구요."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심호흡 몇 번한 뒤에 수화기를 들었는데… 국제전화 거는 법을 몰랐다. 다행히 그때 마침 회의 갔던 사수 O선배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 선배. 이거 책임님이 시키신 거 H사 전화해서 물어볼라는데, 전화 어떻게 걸어요?"

"아, 니 고객사한테 전화 안 해봤제? 어데 전화할라고?"

"H사 P한테요. 중국인데…."

"002 누르고, 그 뭐냐, 국가번호. 중국이니까 86 누르고 그다음에 회사 번호 있다이가. 그거 누르면 뭐라 뭐라 중국어 나오그등? 그면 내선번호 누르면 끝. 오케이?"

"네네, 한번 해볼게요."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고객사 담당자와의 첫 전화통화. 사실 한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할 때나 베이징 교환학생 시절부터 중국어를 많이 써오긴 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보다 전화통화가 몇 배는 더 떨렸다. 그 이유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바로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고, '중국어 대화가 잘 통할까,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까' 그런 걱정 때문이었다. 내선번호까지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서야 마침내 고객과의 첫 전화연결에 성공했다.


 "喂?(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상대는 여성이었고,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외국어로 대화하는 데에 있어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발음이나 억양이 알아듣기에 비교적 수월했던 경험 때문에.

 

"喂?我是L社品保部的H。(여보세요? 저는 L사 품질보증팀 H라고 합니다.)"

“啊,你好。(아, 안녕하세요.)"


 이어 더듬거리는 말로 전화를 건 목적과 업무의 처리 방향에 대해 물었다. 우리 회사는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업체. 주문자의 요청에 따라 생산만 하는 회사였고, 이런 고객사(주문자)-협력사(생산자) 구조에서 업무에 대한 후속 진행은 갑의 위치에 있는 고객사의 지침을 따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전화를 걸어 고객사 담당자에게 후속 진행 방향에 대해 물어본 것.

 하지만, 대화는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한국에서 쓰는 용어와 중국 현지에서 쓰는 용어가 서로 아예 달라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고, 게다가 내가 중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는단 걸 알고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나는 연신 '不好意思,请再说一遍(죄송한데,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와 '那个…那个… (아, 그게… 그게…)'만 내뱉을 뿐. 상대도 답답했는지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는 전화를 마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那,你们为何发生那样的系统问题?(그러면, 그쪽에서는 왜 그런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죠?)"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냥 단순히 정보 전달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당당히 전화를 했던 것뿐인데, 역으로 내게 질문을 던질 줄은…. 그렇다고 전화를 당장 끊고 책임님께 여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不好意思,我再确认详细的内容。我可以发给你微信短信吗?(죄송한데, 제가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보고, 위챗으로 메시지 보내드려도 될까요?"

 "OK, 好的。(네네, 그렇게 하죠.)"


 결국, 자세한 내용을 다시 확인해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말로 전화를 마쳤다. 긴장감과 당황스러움에 식은땀이 비 오듯 났고, 상의는 물론이고 속옷까지 다 젖은 느낌이었다. 전화를 마친 내게 책임님이 오셔서는 통화내용을 여쭤보셨다.


"뭐라든데?"

"아… 그…"

"할 만 하제?"

"아… 아뇨. 일단 고객사 얘기하는 걸 잘 못 알아들었고. 정신이 없어서 뭐 적은 것도 없어요…. 아, 그, 이거 왜 발생했냐고 물어보던데."

"딴 거는?"

"아… 모르겠어요. 그냥 확인해보고 위챗으로 답장해주기로 했는데…"


 첫 전화통화에서 어떤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잔뜩 기죽어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책임님이 흡연장으로 나를 호출했다. 역시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2층 흡연장으로 향했다.


 "아, 괘안타. 처음부터 누가 잘하겠노. 니 사수도 처음에 벌벌 떨었다."

 "너무 빨리 말하기도 하고, 단어를 모르니까. 서로 대화가 안되더라구요. P도 답답했는지 한숨 쉬고…"

 "괘안타, 괘안타. 빨리 말하면 천천히 말해달라하믄 되지. 일단, 발생 원인은 전산팀에 물어봐서 확인해보고, 확인되면 P한테 위챗으로 다시 알려주고."

 "아, 네네. 알겠습니다."

 

 책임님의 위로와 함께 고객과의 첫 전화통화 에피소드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처음 치고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가졌던 고객 대응 업무에 대한 부담감은 어느 정도 덜어냈고, 이제 신입사원의 티를 벗고 본격적인 실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식은땀을 흘릴까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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