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본본쓰 Aug 03. 2020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4) 예측불가의 품질 이슈와 첫 출장.

 3일간의 고객사 오디트는 업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큰 여파를 남겼다. 단순 내방이 아닌 말 그대로 실사, 감사였기에 제조 현장에 대한 지적이 뒤따랐고,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숙제가 되었다. 이에 더해,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품질 이슈에 대해서도 후속 조치와 예방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1개월 차 신입사원의 평화로웠던 나날은 이제 끝이었다. 업무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오디트는 내게 정신적 스트레스와 '멘탈 붕괴' 그 자체가 되었다. 지난 글에서 쓴 것과 같이, '중국어'라는 벽을 직접 실감했던 3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쁜 일상은 내가 그 벽에 가로막힌 좌절감과 우울감을 느끼게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업무를 배우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이슈를 하나하나 처리해나가야 할 품질팀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출장도 그러한 바쁜 일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아, X 됐다…!"


 월요일 오후. 퇴근을 앞두고 있을 때쯤 옆자리에서 터져 나온, 짧지만 임팩트 있는 한 마디. 뭔가 큰 이슈가 발생했다는 걸 직감한 순간, 우리는 늘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흔한 가삿말처럼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왜? 뭐 문제 있나?" 

"라벨 잘못 뽑혀서 출하 나간 거 같은데요…."

"출하 나갔다꼬?!" 

"오늘 출하분 다 잘못 나간 것 같은데…."

"어디꺼? A사?"

"아뇨, H사꺼요. 라벨 오류 나서 일련번호 다 똑같이 나왔어요."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이 문제인 줄도 몰랐고, 이게 출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라벨이 뭔지도 몰랐으니까. 나중에 알게 된 내용은 제품별로 001, 002, 003 … 이렇게 순서대로 출력되어야 하는 일련번호가 어떤 이유에선지 모두 똑같이 001, 001, 001 … 이렇게 출력이 된 것. 제품별로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일련번호가 같으니 구분이 안되고, 그 수량도 굉장히 많았기에 대형 이슈로 이어지는 건 안 봐도 비디오. 일단 이슈는 이미 터졌으니 중국 출하지까지 도착하기 전 어떻게든 처리는 해야 했다.


"책임님, 기사님한테 전화해보니까 제품 지금 다 인천공항 물류센터에 있고, 내일 오후 중에 중국으로 간다네요." 

"다시 못 돌리나?"

"네, 생관에 물어보니까 안된다네요. 어떻게 할까요?" 

"라벨 다시 매뉴얼로 뽑고, 내일 오전에 인천공항 갔다온나. 팀장님한테 보고하께." 

"아, 네. 알겠습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만 있던 나는 뭔가 쎄함을 느꼈고, 퇴근시간이 다가왔음에도 노트북을 접지 않았다. 

 

"뭐 도와드릴 일 있어요?"

"어, 일단 라벨 매뉴얼로 다시 뽑아야되그등. 오늘 쪼끔 늦게 퇴근해야된디." 

"아, 네네. 알겠어요." 

 

 2층 사무실 바로 옆에 위치한 제품창고는 완제품을 포장하는 테이핑 소리와 작업자들의 대화 소리로 시끄러웠다. O선배는 라벨 프린터기에 연결된 한 PC 앞에 앉아 어떤 프로그램을 실행하더니, 능숙하게 그리고 빠르게 001, 002, 003을 차례로 채워나가며 라벨을 직접 수정하고 출력하기 시작했다. 신입사원의 눈에는 그 간단한 라벨 뽑는 일도 굉장히 어렵게 보였다. 뒤에 서서 멀뚱멀뚱 보고 있던 내게 O선배가 할 일을 주었다. 


"일단 급하니까 내가 출력을 해놓으께. 그면 니가 출력한 라벨 있제, 그 맨 뒤에 보면 바코드 숫자 있그등? 그거 제대로 출력됐는지 확인해리." 

"001, 002, 003 이런 순서로요?" 

"응응, 틀린 거 있으면 스탑하라고 얘기해주고." 


 워낙 많은 제품이 출하되었기에 라벨에 있는 숫자를 고치고 출력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라벨이 출력되는 '찌지직, 삐익- 찌지직, 삐익-' 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는지, 제품창고에서 나온 뒤에도 귓가에 그 소리가 맴돌 정도였다. 


"행님, 다 확인했어요." 

"틀린 거 없드제?" 

"네네, 다 봤어요." 

"이거 내일 공항 가서 붙여야 되니까 잘 갖고 있어리." 

 

  O선배는 내게 400장이 넘는 라벨지와 함께, 잘 가지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도 전했다. 



 첫 출장은 다음날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과 설렘을 안고, 동트기 전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O선배와 함께 곧바로 인천공항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라벨 부착이라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가는 내내 고이 모시고 온 라벨지 400장이 잘 있는지 몇 번이고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4시간 만에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셔틀버스로 갈아탄 뒤, 최종 목적지인 B물류센터로 향했다. 물론, 그때의 나는 어미새 따르는 아기새 마냥 O선배만 졸졸 따라다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고. 


"안녕하세요. 저희는 구미에 있는 L사 인데요. 저희가 생산한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다시 조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신분증이랑 명함 주세요. 혹시 어느 분께 연락하셨었죠?" 

"P기사님이랑 통화했었습니다." 

"잠시만요."


 B물류센터 경비실 직원이 기사님과 확인을 하고, 한 직원을 안내를 받은 후에야 우리는 창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넓은 창고에 엄청나게 쌓여 있는 박스들 중 우리가 생산한 제품을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었다. 

 

 "와, 이거 너무 많은데? 일단 우리가 출하시킨 제품은 한 곳에 다 모여있을 거니까 다 찾아보자." 


 한 10여 분을 돌아다녔을까. 다행히도 박스 옆면에 인쇄된 회사 로고를 보고, 우리가 찾던 박스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각각의 박스에 해당하는 라벨을 1대 1로 잘 찾고 그 위에 가져온 라벨을 잘 덧붙이는 일. 


"이거 박스 찾을 때 일련번호로는 구분 안되니까, 제품명이랑 수량 잘 보고 붙여리. 여기서도 틀리면 그냥 여권 챙기고 고객사 찾아가야 된디." 

"네네, 잘 보고 붙일 게요." 


 한 박스에 4장의 라벨 그리고 그 박스 수량이 총 100박스가 넘었으니, 우리는 약 400개의 라벨을 다시 확인하고 붙여야 하는 셈이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출력된 제품명과 수량을 꼼꼼히 대조하고 있노라니,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 게다가 늦여름의 더위가 맹위를 떨쳐서 지치기도 지쳤고. 

 

"행님, 몇 장 남았어요?"

"한 10장 남았다. 니는?" 

"저도 거의 다 했어요. 와, 이거 개빡센데요?"

"이래서 라벨 이슈 나면 골치 아프디." 


 쉬지 않고 박스 매칭과 라벨 붙이기에 몰두한 우리는 12시가 되어서야 마침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임무 완료. 그렇게 첫 출장은 무사히, 고객사에게 들키지 않고 잘 마무리되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할 시간.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는 B물류센터를 빠져나와, 한 부대찌개집으로 향했다. 


"사장님, 저희 부대찌개 2인분이랑 쏘주 한 병 주세요." 

"어, 행님. 저희 술 마셔도 돼요?"

"괘안타. 차 끌고 온 것도 아니고, 한 병 밖에 안되는데."


 음식이 나오고, 허겁지겁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 이렇게 출장 자주 있는 편이에요?"

"음, 해외 출장은 많지. 국내는 거의 없어, 이런 이슈 말고는."

"아하. 근데 어제 오늘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거 때문에 문제 생기고, 어떻게 조치하고 이런거요."

"처음에 뭐 알겠나, 모르지. 내도 처음 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하라니까 했다. 하다보면 다 안다."


 며칠 전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 업무라도 빨리 배우고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모양이다. 물론 신입사원의 욕심이긴 했지만. 점심식사를 하고는 숨 돌릴 겸 돌아가는 차편도 알아볼 겸,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와중에도 O선배에게 걸려오는 고객사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와, 전화 겁나 오네. 이런 거 스트레스 안 받아요?"

"받지, 엄청 받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게 내가 하는 일인데. 니도 조만간 다 하게 될끼다." 

"저번 주 고객사 오디트 왔잖아요. 그때 진짜 멘탈 개박살 났었는데…."

"처음엔 다 그런 거 아이겠나. 괘안타, 니도 나중 되면 웃으면서 일할 걸, 그 순간은 개빡쳐도." 

 

 '처음엔 누구나 다 그렇다'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2년 차 사원임에도 평소 업무 할 때와 지난주 오디트 회의 때 모든 걸 능숙하게 처리하는 사수 선배를 보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던 나였다. 그래도 그 말을 믿고 묵묵히 하는 수밖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에는 그런 믿음이라도 있었어야 했다.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을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고 또한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출장은 첫 발걸음을 뗀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어떻게든 잘 처리해냈고.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낀 첫 출장이었다.  

 

 

이전 04화 고객과의 첫 만남 그리고 첫 좌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