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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Jul 31. 2020

고객과의 첫 만남 그리고 첫 좌절.

(3) '중국어'라는 벽과 마주하다. 

"행님, 이번 주 대만에서 고객사 온다 하지 않았어요?"

"대만 아니고, 중국." 

"아아, 중국. 오기 전에 준비해야 될 거 뭐 있어요?"

"호텔 예약하고 회의실 잡아놓고, 뭐 다른 건 없다. 니는 따로 할 거 없고, 내만 바쁠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입사 직후에 무슨 일이 그리도 많았는지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었다. 고객사 내방도 그 많은 일들 중 하나였다. 우리 팀은 해외파트와 국내파트로 나뉘었는데, 해외파트 담당 고객사는 중국과 대만에 위치한 중화권 기업들이었다. 입사 후 처음 마주하는 고객사는 중국 본토에 있는 기업. 사실 당시에는 고객사가 어떤 회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 회사에 내방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도 고객이 온다고 하는데 준비를 안 할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P호텔이죠? 4공단에 있는 L사인 데요. 이번 주 수목 혹시 객실 예약 가능한가요?" 

"아, L사요? 한 분 오시는 건가요?"

"아뇨, 두 분이 오시는 거라 객실 2개 예약하려구요."

"501호랑 502호로 잡아드리면 되죠?" 

"음... 잠시만요. (옆자리 사수 선배에게) 얼마짜리 잡아야 돼요? 아, 10만 원 내로? 오케이. 10만 원 안쪽으로 잡아주세요." 

"네네, 두 객실 모두 1박 9만 원이에요. 이걸로 잡아드릴게요." 

 

 호텔 객실 예약하는 데에도 식은땀이 뻘뻘 났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하며 호기롭게 객실 예약을 하려 했으나…. 회사에서 허용하는 숙박료 한도도 몰랐을뿐더러, 사무실에서 예약전화를 걸었던 터라 혹여나 실수해서 다른 선배들이나 상사들이 통화내용을 들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얘는 호텔 예약하나 제대로 못 하나'라는 얘기를 들어서는 안되니까. 뭐,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혼자만의 기우이긴 했지만. 

 



 고객사 내방 전날에는 잠자리를 설쳤다. 중국 고객사가 오면 모든 회의와 대화를 중국어로 진행해야 할 것이며, 주로 사수 선배가 통역을 담당하긴 하겠다만 분명 내가 해야 하는 몫도 있었을 테니. 잔뜩 긴장한 채로 맞이한 고객사 내방 당일. 


 "H, 내 고객사 픽업 갔다 올 테니까 회의실에 음료수랑 물이랑 좀 사다 놔리."

 "네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려요?"  

 "한 15분? 정문 도착하면 전화하께."


 기차역에 도착한 고객사 담당자 2명을 데리러 사수 선배가 픽업을 간 사이, 매점에서 음료수와 물을 잔뜩 사서는 고객사 담당자를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일까. 고객사 내방하면 어떤 일을 할까. 나한테도 질문을 하겠지?' 머릿속엔 궁금증과 함께 긴장감과 걱정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H, 이따가 오디트 같이 들어와." 

"네?" 

"고객사 오면 회의 같이 들어오라고. 들어와서 어떤 내용인지도 좀 들어보고." 

"아, 네네. 알겠습니다!" 

 

 팀장님의 호출이었다. 고객사 내방을 우리 업계에서는 보통 오디트(Audit)라고 불렀는데, 그전까지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 없었던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대충 알아듣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곧 2층 사무실 앞 복도에 낯선 목소리의 사내 둘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아, 왔구나!' 

 2층 대회의실에서 시작된 오디트에는 회사 모든 부서의 실장님들과 팀장님들이 참석을 하셨다. 회사에 그렇게 많은 실장/팀장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줄 몰랐고, 동시에 오디트의 위상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더욱 긴장이 되기도 했고. 회의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고객사 담당자가 들어오자 명함을 나눠주며 인사를 건네느라 정신이 없었고, 간간이 짧은 영어와 중국어도 들렸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내 소개와 인사는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리팅 타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디트. 팀장님의 지시대로 오디트 회의에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하나하나 적어보려 했지만, 중간중간 들리는 짧은 중국어 단어 말고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당황과 무력감의 연속이었다. 반면, 사원 직급임에도 회의를 주도하고 멋지게 통역하는 사수 선배를 보며,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감탄을 하고 있던 순간,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겠나?" 


 옆에 앉은 J책임님이 귓속말로 여쭤보셨지만, 내 대답은 절레절레.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기는 뭐해서, 학창 시절 듣기 평가 치르는 것 마냥 진지한 태도로 들리는 단어들 아무 거나 적어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오전 회의가 끝이 났고, 메모장을 펼쳐보니 제대로 적은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중국어를 꽤나 공부했던 나였는데….




 "점심은 전복 삼계탕 먹으러 가자." 

 

 멀리서 오신 손님을 대접하기에 전복 삼계탕은 아주 좋은 메뉴. 팀장님의 지시 아래, 나는 J책임님과 함께 회사 인근에 위치한 삼계탕집으로 향했다. 실장님과 팀장님, 그리고 사수 선배와 고객사 담당자 두 명은 각각 따로 왔는데, 도착해서 O선배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쏟아냈다. 

 

"행님, X 됐어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크크크, 마 괘안타. 처음엔 내도 그랬다." 

"아니, 진짜 심각한데..." 


 그때 고객사 담당자와 눈이 마주쳤고, 흠칫 놀랐지만 그리팅 타임 때 하지 못한 인사와 간단한 소개를 침착하게 했다. 

 

"你好,我是品质部门新进职员H。 我还没收到名片,所以不能给你们名片,不好意思。(안녕하세요, 품질팀 신입사원 H라고 합니다. 아직 명함을 받지 못해서 드릴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哈哈,没事儿。 我是B。(하하, 괜찮아요. 저는 B라고 해요.)”


 짧은 대화와 함께 명함을 받아 들고는 바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에 대한 첫인상은, 다행히 꽤나 젠틀한 사람들 같았다는 것. 자리에 앉고 나서야 진짜 실전이었다. 처음엔 사수 선배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고, 회의 때의 살벌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즐겁게 이야기가 오고 갔다. 물론, 과도한 긴장감 탓에 식사도 전에 토할 것 같았지만. 곧이어 주문한 전복 삼계탕이 각자의 자리에 놓였고, 식사를 시작했다. 


"H, 소금 좀 넣어드리고, 전복 삼계탕 먹는 법 설명해드려라." 


 긴장하고 있던 중에, 팀장님이 내게 말했다. 머릿속에는 '전복 삼계탕은 전복이랑 닭이랑 같이 넣어서 만든 한국 음식이구요. 먼저 닭고기를 소금에 찍어서 드시면 됩니다.'라는 짧고 간단한 문장이 떠올랐지만, 동시통역을 해본 적 없는 내겐 너무 어려운 문장이었다.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담당자와 눈이 마주치고 '아, 망했다'라고 생각한 순간, 머리가 완전히 굳어버려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

"야,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고객사 앉혀놓고 아무 말 안 할 거야?"  

 

 팀장님의 다그침에, 옆에서 보다 못한 O선배가 나를 대신해서 통역을 해주었다. 그 뒤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제대로 말할 자신도 없었다. 고객사와의 첫 대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나는, 좋은 모습은커녕 최악의 신입사원이 되어 버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무력하고 참담했던 심정. 정말 좌절 그 자체였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그 비싼 전복 삼계탕과 인삼튀김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바늘방석 같았던 식사시간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팀장님이 충고의 한 마디를 던져주셨다. 


 "야, H. 고객사 왔으면 니가 케어하고 니가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지. 신입사원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아, 죄송합니다." 

 

 회사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 오디트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나는 이미 멘탈이 완전히 박살 나 있었고 계속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 병신 새끼. 그때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지. 그걸 그냥 가만히 있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기회가 한번 더 있었다. 저녁식사를 겸한 고객과의 술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원평동 장어집 있지? 글로 갈 거야. 우리 차 따라오면 돼."


 하루 종일 진행된 회의가 오후 6시 무렵 끝나자, 팀장님은 나와 J책임님께 시내에 있는 장어 음식점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부리나케 바로 짐을 챙기고는, 팀장님이 말씀하신 장어 음식점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음식점에는 실장님, L팀장님, O선배, 그리고 QC팀 K팀장님과 고객사 담당자 B와 R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빈자리에 앉았는데, 하필 고객사 담당자 R 옆에 앉게 되었다. 점심식사 자리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최대한 눈치껏 움직이고 조금이라도 말을 걸어보려 노력해보았다. 


"你之前来过我司吗?(예전에 저희 회사 와보신 적 있으세요?)"

“没有,是第一次。(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啊,是吗?那,B呢?(아, 그래요? 그러면, B씨는요?)"

"他可能几次来访L社,我刚开始负责贵司了。(B는 몇 번 와봤을 걸요, 저는 막 당신네 회사 담당하기 시작했어요.)"


 어쭙잖은 대화였지만, 부담감이 덜해서였는지 점심식사 때보다는 괜찮은 이야기가 오갔다. 뻔한 레퍼토리이지만 나이는 몇 살이고 사는 곳은 어디며, 학교는 어딜 나왔고 원래 전공은 무엇인지, 중국어는 어디서 배웠는지 등등. 무엇보다도 상급자가 시키는 통역이 아니었기에, 알아듣지 못해도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 편한 대화는 오래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수 선배가 잠시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어김없이 내가 통역을 맡아야 했다. 편한 대화에는 그렇게 술술 말이 잘 나오다가도, 상사분들이 시키는 말은 쉬운 말이라도 언뜻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속 괜찮으신지 여쭤 봐. 2차 가야한다고."

"어… 잠시만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말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표현인데도 끝내 말하지 못했다. 점심식사 자리처럼 다들 내 입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엄청난 부끄러움과 좌절감을 느끼며, 식은땀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결국 이번엔 그냥 팀장님이 영어로 대충 얘기하고는 넘어갔다. 이어진 2차 술자리에서는, 통역이고 뭐고 숙취에 죽어나갔다. 기억이 통으로 사라진 건 덤이고.



 이 날은 '중국어'라는 벽을 입사 후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하루였다. 그때의 기분, 그때의 기억이 그 순간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야 하는 일인데 첫 출발이 너무나 안 좋았고, 자신감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기억은 그뒤로도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고, '중국어'는 내가 가진 장점과 역량이 아닌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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