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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Aug 14. 2020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

(6) 새로운 업무에서 오는 부담감과 스트레스.

  시간은 흘러 연도의 뒷자리가 8에서 9로 바뀌었고, 새해를 맞이하는 모두가 그렇듯 직장에서도 새 마음으로 새 출발하자며 파이팅을 불어넣으려는 분위기였다. 사무기술직, 현장직, 임원직이 모두 모인 시무식에서도 사장님은 그토록 파이팅을 외쳤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전혀 파이팅이 되질 않았다. 해마다 으레 하는 말이겠니 하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스스로 파이팅을 불어넣지도 않았다. 이미 그전부터 난 많이 지쳐있었다.

 

 "자, 새해도 맞이 했고 예전에 얘기한 것처럼 품질보증실 내에서 일부 조직개편이 이뤄집니다."


 2층 대회의실에 QA팀과 QC팀, 그러니까 품질보증실 소속 직원이 모두 모였고 그 자리에서 팀장님이 먼저 운을 뗐다. 사실 해를 넘기기 전 사무실 내의 분위기는 뭔가 어수선했었다. QA팀에서 팀원 몇 명이 QC팀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가장 유력한 후보는 S책임과 룸메이트 P였다. 같은 품질보증실 소속이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팀이었고, 팀 분위기나 성향, 업무 자체도 달랐기 때문에 다들 부서 이동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회사는 군대와 같이 수직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기에, 까라면 까야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S책임이랑 P가 오늘 부로 QC팀으로 넘어가는데… 뭐, 이제 같은 팀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실 소속이니까 서로 잘 도와주도록. 고생했으니 박수 한 번."


 그동안 고생했고 앞으로도 고생하라는 의미에서 모두들 힘찬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담당 업무 분장에 대한 공지.


 "S책임이 QC팀으로 넘어가면서 국내파트는 H책임이 이제 파트리더 되는 거고, 그 밑에 S랑 J, U가 국내 고객사 담당하는 걸로. 원래 S책임이랑 P가 하던 업무 나눠서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해외파트는…"

 

 해외 파트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굉장히 긴장했다. 전부터 J책임님이 그간 O선배가 전담했던 해외 고객사 업무를 조금씩 내게 넘겨주려는 느낌을 받았었기에 그런 부분들이 반영될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닐곱 개나 되는 해외 고객사들을 J책임님과 O선배 단 둘이 담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J책임이 해외파트 PL이긴 하지만 최고참이니까 국내파트도 잡아줘야 되고. H도 이제 어느 정도 일하니까, H가 H사랑 N사 넘겨받아서 전담하게 될 거다."


 '아, 올 게 왔구나.'

 예상한 대로, 이제 내게도 전담 고객사가 생기게 되었다. N사야 워낙 생산량이 적으니 품질 이슈가 난 적이 없었고 혹여 나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H사는 앞선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고객사였다. 품질 이슈를 늘 달고 다니는…. 그리고 고객 CS 업무 부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객 성향에 있어서도, H사는 강경파에 가까운 성향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반도체를 다뤄왔던 전문가들이라 내가 상대하기에는 힘든 고객들이었다. 입사한 지 고작 4개월 된 신입사원이 반도체 전문가들을 상대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고객 CS는 다들 그렇게 시작한단다. 언젠가 하게 될 업무이긴 했지만 막상 닥치게 되니 엄청난 부담감과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 뒤의 이야기들은 모두 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마도 시무식에서 사장님이 외친 파이팅을 똑같이 외치지 않았을까. 회의실에서 우르르 나온 팀원들은 사무실에 들러 믹스커피 한 잔씩 들고 흡연장으로 향했다. 내가 만약 흡연자였다면 줄담배를 태웠을까.


 "행님, 잘할 수 있을까요?"

 "걱정 안 해도 된다. 내랑 책임님이 다 도와줄 끼다."

 "아, 아직 진짜 아는 거 없는데… 전화할 때도 벌벌 떨잖아요."

 "내도 처음에 아는 거 하나도 없었다. 전화도 마찬가지고. 처음부터 다 알고 다 잘했으면 여기 안 있겠지…."

 "그렇긴 한데…"

 



 O선배가 얘기한 것처럼 한동안 대부분의 업무는 J책임님과 O선배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해결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의존도는 점점 낮아지게 되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업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무실은 언제나 각자의 일로 바빠 보였고, 그 틈에서 뭔가를 물어볼 용기도 쉬이 나질 않았다. 설령 내용을 정리해서 물어본다한들, 경험 적은 신입사원이 놓치는 부분들은 너무나 많았다. 


"책임님…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어, 뭐. 얘기해." 

"그, 저번에 H사 이슈 나서 대책 세운 거 있잖아요. 그거 업데이트해서 자료 보내줘야 되는데, 정리는 해놨거든요. 근데 이게 방향이 맞나 싶어서…"

"일단 정리한 거 가져와 봐."

"아, 여기 있습니다."

"에? 이게 정리한 거가? 이거는 그냥 니가 현상들만 나열한 거고, 이 내용으로 뭘 얘기하고 싶은데?"

"음……"

"저번에 내가 얘기한 거 추가도 안 해놓고, 현장 가서 제대로 보긴 했나."

"다시 확인해서 추가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실무를 시작해서였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막막한 것 투성이었고, 늘 실수하기 일쑤였다. 그 과정 중에 분명히 업무 이해도라든지 업무 처리 속도는 조금씩 늘어갔지만,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그보다 훨씬 많이 쌓여갔다.


 그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외적으로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바로 수면장애였다. 규칙적인 생활패턴을 지향했던 나는, 늦은 회식이나 정말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오후 11시에는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고 정확히 다음날 오전 7시 10분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고객사를 전담하게 되는 일, 즉 본격적인 고객 CS 업무를 담당하게 되고 나서는 오후 11시에 누워 새벽 2-3시가 되어서도 잠에 들지 못했다. 충분하지 못한 수면시간은 피로감과 집중력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는 월화수목금금금을 버텨야 하는 직장인에게는 치명타였다.

 수면장애뿐만 아니라 공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출근 전 비몽사몽인 채로 샤워하는 내내 '오늘은 어떤 업무가 나를 괴롭힐까, 고객사한테 어떤 질타를 받을까, 전화 한 통 제대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업무시간에 처리해야 할 고객의 요청은 업무가 아닌 그저 괴롭힘으로 느껴졌다.


 이 부담감과 스트레스의 근원은 부족한 중국어 실력과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업무 특성상 고객과의 전화통화가 잦은 편이었는데, 부족한 중국어 실력 때문에 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업무에 진척도 없었다. 정상적인 업무 요청보다 고객으로부터의 질타와 싫은 소리가 더 많아지게 되니, 심지어는 업무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여러 차례 수신을 거절하다가, 어쨌든 일 처리는 내 손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으면… 그 결과는 언제나 내 깊은 한숨으로 이어졌다.

 사실 중국어 실력보다 더 큰 문제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작은 품질 문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고, 용기 내어 동료들에게 물어보고자 하면 '이것도 모르냐고 타박하지 않을까', '이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맞을까', '바쁘다고 안 알려주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늘 먼저 앞섰다. 이런 걱정들에 머뭇거리면, 시간은 지나 있고 진척은 없었다. 신입사원 때는 누구나 이렇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2년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늘 이런 걱정으로 업무 처리에 어려움이 있던 나였다.


 이렇듯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갔고 자신감 결여와 우울감으로 번져 갔다. 아마도 이때부터 나는 우울이라는 감정에 지배되었던 것 같다. 전담 고객사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고객 대응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상은 더욱더 바빠졌고,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격려와 동기부여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무실에서 영혼 없이 업무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그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표현이 가장 맞는 듯하다.

 인문학 전공자 치고는 꽤 많았던 초봉 4000이라는 연봉과 복리후생, 중견기업으로 갖출 건 다 갖춘 업무 시스템과 프로세스, 그에 더해 성격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팀 분위기는 그 누구라도 입고 싶어 하는 '비싼 명품 옷'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은 너무 초라했고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적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이 일을 계속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땐 누구에게도 내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하는 일이고 이 일을 하려고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이니까. 나만 빼고 다들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어떻든 간에 처리해야 할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당장 눈앞의 그 업무들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이 악물고 버티고 버티다가 맞이한 첫 해외출장. 그곳에서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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