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본본쓰 Aug 22. 2020

첫 번째 퇴사 선언 : 책임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7) 첫 해외출장과 첫 퇴사 선언. 

- 고깃집에서의 퇴사 결심. 

 입사한 지 7개월을 갓 넘겼을 무렵. 업무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 갔고, 심지어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게 될 정도였다. 퇴사에 대한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오던 중이었다. 결정만 하지 못한 채. 그러던 와중에 예상보다 이른 해외출장 계획이 잡혔다. 팀장님과 책임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느 정도 업무에 녹아들었다고 판단하셨는지, 하루는 나를 자리로 부르셨다.


"H, J책임. 일로 와봐."

"네, 팀장님."

"H, 중국 비자 신청해놨지?"

"아, 네. 비자 받아놔서 준비는 돼있습니다."

"월말에 S사 갔다 오고, 다음 달 초엔 N사 갔다 와라."

"심천이랑 상해요?"

"어어. 고객사 담당자한테 미리 얘기해서 미팅 날짜 확정해놓고, 항공권이랑 호텔 예약하고."

"네, 알겠습니다."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못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멘탈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인 데다 전화통화도 제대로 못하는데 회의는 어떻게 주관할 것이며, 고객사 담당자와 식사도 해야 할 텐데 얘기는 어떻게 주도할 것이며…. 크고 작은 걱정들이 하나하나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불안감과 걱정은 쉽사리 사라지질 않았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머리가 하얘져서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질 못했다.

 

"선배, 커피 한 잔."


 너무 걱정되고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결국 사수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금 이대로는 절대 출장을 갈 수 없다고. 가서 쪽만 당하고 올 거라고.


"행님, 이번 출장이요… 도저히 안 될 거 같은데…."

"안 되겠나? 뭐 땜에?"

"일단 중국어가 안돼요. 아시잖아요, 통화나 겨우겨우 하고 있는데, 출장이라뇨…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지금 가면 진짜 개쪽만 당하고 올 텐데."

"괜찮다. 나도 입사하고 몇 달 안 있다가 출장 갔었는데. 그냥 가서 고객사 담당자 인사하는 거고, 회의는 책임님 하는 말만 그냥 통역하면 된다. 뭐 무거운 회의도 아니고, 품질 이슈 있어서 가는 거도 아니다이가."

"아… 그래도 좀…. 멘탈 박살날 것 같은데."

"음… 그면 일단 내가 팀장님한테 말씀드려보께. 정 안되면 내가 대신 갔다 오면 되지."

 

 고객 CS 업무를 하면서 언젠간 한번 부딪혀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로 지쳐있던 내가 갈 만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No'. 가야 했다. 그러나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긴 했다. 팀장님이나 책임님이나 두 분 모두, 가볍게 가는 해외출장이니 부담감 갖지 말라고 하셨고 회의자료 준비도 도와줄 터이니 괜찮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이렇게 좋은 상사들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해외출장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마침내 퇴사 결심을 했다.  




 짧은 직장생활 내내 외국인 고객을 맞이하고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소통하는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고, 나는 그 벽을 넘기 위해 나름대로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벽을 넘는 데에 번번이 실패했고, 이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요 고객사 중 한 곳이었던 F사의 담당자가 내방을 했던 날. 고객사 내방 일정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식사 대접 자리. 숱하게 많았던 식사 대접 자리였지만, 중국어 한 마디 못하는 상사를 모시고, 회사 입장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외국인 고객을 상대로 식사하기란 매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어 장벽도 큰 문제였지만, 그 외적인 요소들 역시 많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딱딱한 분위기를 풀 만한 농담이라던가, 고객사를 기분 좋게 하는 사탕 발린 말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국내외 이슈들에 대해서 등등. 사수였던 O선배는 늘 수월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해냈지만,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H, 고객이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내 화장실 좀 갖다오께."

"아, 넵. O선배는요?"

"기숙사에 차 대고 온단다."

 

 그렇게 나와 고객사 담당자, 둘만 남은 테이블. 어색하게 있기 뭐해서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초면도 아니었고, 업무 하면서 그렇게 많이 대화를 했었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간은 흘러만 갔다.

 

"얘기 좀 했나?"

"아, 예… 뭐." 


 자리로 돌아온 책임님은 O선배가 올 때까지 고객이 뻘쭘하지 않게 어떤 말이든지 뱉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방금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딱히 떠오르는 말도 없었고, 있다손 쳐도 제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100% 정확하게 알아들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고. 다행히 O선배는 금방 우리가 있는 식당으로 찾아왔고 그 뒤로는… 아주 원만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벽을, 그 문턱을 이번에도 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H, 얼굴 안 좋아 비는데? 어디 아프나?"

"아, 아뇨. 속이 별로 안 좋아서…."


 이날 식사자리를 파할 때까지 나는 입을 거의 떼지 않았다. 간간이 오가는 대화에 영혼 없는 웃음만 지었고, 그저 고기 굽는 일에만 집중했다. 머릿속에선 앞으로의 내 거취에 대해서 고민만 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결심했다. 퇴사하기로.


 사실 이날이 기폭제가 되었을 뿐, 입사 몇 달 뒤부터 퇴사는 줄곧 내 목표가 되었다.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꿈꾸는,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취업 준비를 할 때의 그 간절함, 입사 직후의 열정과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곳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었다.

 '나는 애초에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늘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잖아. 더 능력 좋고 우수한 인재가 오는 게 맞는 거야. 나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가면 되는 거고. 그래, 퇴사하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온통 퇴사 생각뿐이었고, 이미 내 결심을 되돌리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온 스트레스는 어느새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고, 이날 느꼈던 패배감과 좌절감을 매일 느끼며 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민 끝에 퇴사 선언은 며칠 뒤 예정된 첫 해외출장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전에 결정했다면 이 해외출장도 가지 않았겠지만, 나 스스로도 너무 갑작스러웠던 퇴사 결심을 고려해서 이번만 딱 눈 감고 갔다 오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S사 담당자분이 한국인이라 크게 부담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었고.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 첫 해외출장에서의 첫 퇴사 선언.

 첫 해외출장을 떠나는 당일. 이른 비행기 탑승시간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짐을 챙겨 나왔고, 기숙사로 데리러 오신 책임님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수속을 마친 나와 책임님은 비행기를 타고 3시간여를 날아, 무사히 중국 선전(深圳)에 도착했다. 그전부터 개인적으로도 자주 오가는 중국이었지만 선전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중국어 한 마디 못하시는 책임님을 보필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감은 더욱 커졌다. 퇴사 선언을 앞둔 떨리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선전에 머무르는 2박 3일 안에 무조건 퇴사를 얘기하기로 스스로 결심했고, 출장 내내 그 타이밍만 기다렸다. 사실 그 타이밍은 몇 차례 찾아왔었다. 도착 당일 라오지에(老街)의 한 현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다음 날 고객사 사무실 앞에 위치한 한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 그리고 떠나는 날 호텔 조식을 먹을 때.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토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음에도, 상사에게 공식적으로 퇴사 선언을 하기란 너무나도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 

비행기에서도, 라오지에에서도, 호텔 식당에서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


 사실 퇴사 선언을 제외하면, 첫 해외출장의 기억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다행히 선전 도심에 위치한 고객사 사무실까지 잘 찾아갔고, 회의에서도 주요 현안에 대해 큰 무리 없이 담당자와 주고받았다. 담당자분이 같은 한국인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어색하기는 했지만, 식사 자리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반도체 업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나 중국 비즈니스 이슈에 대해서도 잘 얘기할 수 있었다. 신입사원에게 좋은 기회였던 것임은 분명했다. 물론 내 머릿속엔 '책임님께 퇴사한다고 언제 말씀드리지'라는 생각뿐이었지만 말이다.


 퇴사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보는 동안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어느덧 첫 해외출장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선전 바오안 국제공항. 수속을 다 마치고 출국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비행기 탑승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책임님과 함께 간단히 끼니를 때울 요량으로 공항 안에 있는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 식당은 공항에서 유일하게 한국 음식을 팔고 있던 식당이었는데, 그 유일한 한식 메뉴는 라면이었다. 각각 한 그릇씩 시키고 나서 금세 음식이 나왔고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없는 라면은 처음이었다. 가뜩이나 퇴사 생각에 마음이 잔뜩 무거웠는데 라면까지 맛없었으니, 인생 최악의 라면이 아닐 수 없었다. 몇 입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놨고, 책임님이 드시는 동안 '지금 퇴사 얘기를 꺼낼까, 말까'를 수 십, 수 백 번 고민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나는 퇴사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탑승게이트 대기석에 앉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던 책임님과 나. 비행기 탑승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내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고 초조해져 갔다. 선전에 오기 전부터 나 스스로 이번 출장의 목표는 '퇴사 선언'이라고 결심했었고, 2박 3일의 일정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비행기에 타는 순간부터는 이 얘기를 절대 꺼내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 이제는 진짜 얘기해야 한다. 이제 얘기해야 해…' 그렇게 꽤 오랜 시간 퇴사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만 보고 있던 와중에, 비행기 탑승을 겨우 10분 앞두고 어렵사리 입을 뗐다. 

 

"책임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책임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한참을 뜸 들여서야 그렇게 꺼내고 싶었던 '퇴사'라는 단어가 겨우 입 밖으로 나왔다. 이 한 마디를 하는 게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때부터 코끝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무덤덤하게 퇴사 얘기를 꺼낼 줄 알았고 얘기하고 나면 마냥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되돌아온 책임님의 반응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충격으로 가득한 표정과 수많은 물음표였다. 

 

"…… 갑자기? 아니… 아니, 왜?"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책임님의 잔뜩 커진 동공과 갈 곳 잃은 손. 누가 봐도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회사에서는 조금도 내색하질 않았었다. 성격과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 감당해내기 힘들었던 부담감과 스트레스, 그리고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이 모든 이야기는 오직 사수 선배에게만 털어놓았었다. 나는 책임님의 그 수많은 물음표에 대답을 해야 했다. 


"일이 힘들어서? 아니면 뭐 어떤 거 때문에?" 

"고민을 진짜 많이 했는데요. 그… 일이 저랑 너무 안 맞습니다. 고객사 내방할 때나, 전화통화로 업무 할 때마다 너무 버거웠어요. 저랑 안 맞는 일이기도 했고, 중국어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 아니, 그래서 진짜로? 진짜 퇴사하겠다고?!" 

"음… 네…."

"와… 진짜 당황스럽네. 이거 팀장님한테 어떻게 말씀드리냐…. 너무 충격인데? 끄억, 꺽꺽꺽." 


 적잖은 충격을 받아서인지 책임님은 거의 절규에 가까운 웃음까지 내뱉으셨다. 하지만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그동안 얼마나 큰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나를 어떻게 괴롭혀왔는지도 설명드렸다. 물론 어느 상사든지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할 테고, 그들은 모두 올챙이 적 기억 못 하는 개구리이겠지만, 책임님은 아니길 바랐다. 


 "잠도 제대로 못 자요. 내일은 어떤 일이 날 힘들게 할까. 고객사에게 어떤 욕을 먹을까. 이런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더라구요. 주말에 부산에서 올라올 때는… 버스가 사고라도 났으면 하고, 구미 도착해서 산호대교 지날 때는 뛰어내릴까도 생각했었어요……" 


 그간의 감정들을 토해내자, 그와 동시에 목이 메면서 눈물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책임님은 나를 먼저 달래주셨고, 나는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 어찌했든 퇴사만 한다면 이 모든 상황들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 정도로 힘들었나? 이 정도면 심각한데…… 병원엔 가봤나?"

"가려고 생각은 했었는데, 가진 않았어요."

"음… 근데 H,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이.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많이 생각하겠지만, 주변에선 다들 칭찬 많이 하고 있다고. 니가 지금 신입사원이니까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감도 잘 안 오겠지만, 다들 잘하고 있다고 칭찬이 막 들려와. 막말로 일을 존나 못했으면, 니가 나간다고 할 때 이렇게 잡지도 않지. P 알제? 니 들어오기 전에, O사원이랑 같이 들어왔다가 예전에 퇴사했다는 아. 가 나간다고 할 때는 진짜 아무도 안 말렸다." 


 책임님의 만류는 계속 이어졌다. 잘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도. 

 

"아, 그리고. 니 지금 스물여덟이제?"

"네, 스물여덟이죠…"

"니도 알겠지만 지금 니 나이 때가 진짜 중요한 시기인데, 경력 못 쌓고 나가면 불러주는 데 없다. 최소 3년은 해야 이직도 하는 거지. 스물여덟, 아홉 돼가 신입으로 들어갈 것도 아이고.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스펙도 엄청 고스펙도 아니어서 지금 다시 취준하믄 몬할 걸? 지금이야 사회초년생이고 신입이니까 모든 게 다 힘들고 걱정이겠지만, 현실적으로도 잘 생각해야 돼."

 

 책임님은 마지막으로 O선배 찬스를 이용해 나를 설득시키려 애를 쓰셨다.


"니 사수 O사원 봐라, 똑같다. O도 작년 이맘때쯤 나간다고, 딴 회사 면접까지 다 보고 왔었다고. 근데? 지금 잘하고 있잖아. 맞지? 그때 O도 니랑 똑같이 얘기했었다. 일단 너무 성급하게 나갈라 하지 말고, 딱 3년만 내만 믿고 따라오면, 진짜 일 제대로 배우고 멋지게 이직할 수 있다. 오케이?" 


 이렇게나 진지하게 퇴사를 극구 말리고, 회사에 남아 이 시기를 잘 이겨내라는 책임님의 말에 나도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다. 사실, 나 또한 자신이 없었다. 여기보다 더 좋은 회사, 여기보다 더 잘 맞는 일을 찾을 자신이. 또, 누구나 겪는 이 시기를, 나 또한 잘 견뎌냈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남아있었고. 결국, 긴 침묵 끝에 어렵사리 마지막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오늘 얘기는 니랑 내, 둘만 아는 거다이. 팀장님한테 얘기 안 하께."


 어렵게 마친 이야기 뒤에는 어색한 기류와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비행기 탑승 마감시간이 임박해서였는지, 마침 그때 나온 안내방송이 그 어색함과 침묵을 깨 주었다. 


"대한항공에서 마지막 탑승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항공 KE828 인천행 항공기 탑승이 곧 마감될 예정입니다. 인천으로 출발하시는 손님께서는 속히 A4번 탑승구로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가자, 이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질질 끌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어색한 기류만 흘렀고, 이륙 직전에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책임님이 한 마디 하셨다. 


"아까 얘기했던 거 잘 기억하고, 생각 바꾸지 말고. 한국 도착할 때까지 한번 잘 생각해봐." 


 그토록 고심했던 내 첫 번째 퇴사 선언은, 그렇게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전 07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