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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Aug 26. 2020

그냥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만큼.

(8) 퇴사 실패 후, 두 번째 해외출장에서.

 첫 번째 퇴사 선언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J책임님의 회유와 만류에, 결국 나 역시 퇴사에 대한 마음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온 한국. 주말 내내 그 순간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때 나는 왜 머뭇거렸을까. 왜 더 단호하게 퇴사하겠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스스로에게도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현실적으로는 직장인으로서의 사회적/경제적 안정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주말은 찰나와도 같아서, 퇴사 선언 직후의 감정과 정신을 추스를 만한 시간적 여유라고는 없었다. 이내 월요일이 찾아왔고 여느 때처럼 묵묵히 출근길에 나섰다. 그토록 오래 그리고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결심한 결과, 허심탄회하게 책임님께 말씀드렸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은 그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려 했고,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말이다.


"H, 커피 고."


 팀장님의 호출이었다. 책임님이 팀장님께 지난 출장 간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었는지, 이전보다 팀장님의 호출이 잦아졌다. 책임님은 분명 내게는 둘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말씀하셨지만, 역시 믿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루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던 팀장님과의 커피타임이 하루에 두세 번으로 늘어난 것만 봐도 그랬다. 그 연장선 상에서 팀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빌미 삼아, 팀장님이 필두로 나서서 팀원들과 함께 퇴근 후 찜질방엘 가기도 했고 인근 계곡에 캠핑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업무량은 여전히 많았고, 그에 더해 출장을 다녀온 후의 회의록과 변경사항 공지, 그리고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쌓였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야근도 종종 하곤 했다. 다시 돌아와서 팀장님과의 대화. 큰 여파를 남긴 첫 해외출장 직후, 바로 이어서 또 다른 출장을 나서야 했다.


"이번 출장은 어땠나? 첫 해외출장이지?"

"아… 네네. 뭐, 나름 괜찮았습니다."

"저번에 얘기한 것처럼, 다음 주에는 상해에 있는 N사 가야 되는데 괜찮겠나?"

"네네, 안 그래도 말씀드릴라 했는데, 담당자가 10일 미팅하자고 하는데 괜찮으시죠?"

"오케이."


 팀장님과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마침 P형님과 마주쳐서 팀장님은 사무실로 돌아가시고 나는 다시 커피타임을 가졌다. P형님은 회사 안에서 사업부가 달라 같이 일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중국 고객사를 대응한다는 점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형님이었다. 그래서인지 O선배와 함께 가장 친분이 두터운 동료 중 한 명이었다.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특히나 안 좋은 일들을 얘기할 때는 보통 P형님과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이번 소재는 당연히 내 퇴사 선언이었고.


"행님, 이번에 저 퇴사한다고 했어요."

"어? 책임님한테? 뭐라시던데?"

"그냥 뭐… 흐지부지 됐죠.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타기 직전에 얘기했는데, 일단 더 하기로 했어요."

"그래, 뭐 처음 1-2년은 고비 온다."

"아, 모르겠어요. 진짜 퇴사하고 싶었는데 막상 책임님이랑 얘기해보니까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알지, 알지. 그래도 분기마다 한 번씩은 퇴사 소스 좀 흘려줘라. 윗사람들은 사원들 군말 없이 일하면, 편한 줄 알고 더 시킨다. 크크크. 너무 자주는 안되고."


 P형님은 가까운 미래라도 내다본 점쟁이 마냥 앞날을 예언했다. 나중에도 나오겠지만, 거짓말처럼 나는 거의 분기마다 한 번씩 퇴사 선언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매번 수포로 돌아갔지만.      




 며칠 뒤, 그렇게도 가고 싶지 않았던 상해 출장 당일이 찾아왔다. 심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게다가 이번에 찾아가는 곳은 중국 현지 고객사, 담당자는 당연히 중국인. 제대로 통역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담감이 엄청났고, 책임님도 아닌 팀장님을 모시고 가는 출장이라 더욱 긴장되었다.

 이른 아침 회사 정문으로 출근하여 팀장님 차를 기다렸다. 익숙한 구형 은색 K5 차량에 몸을 싣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사실 출장 떠나기 며칠 전부터 팀장님과의 어색한 대화를 어떻게 풀어갈까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기억나는 대화는 팀장님 가족에 대한 이야기, 평소 즐기는 골프, 낚시 등 취미 이야기, 신입사원 이야기.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사무실에선 그토록 무섭게만 보이던 팀장님도 인간미 넘치는 옆집 아저씨처럼 보였다. 차를 타고 2시간 반 정도를 달리면서 나눈 대화 중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팀장님, 이번에 가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출장에 대한 부담감과 긴장감을 가지고 있던 중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의외로 팀장님은 진심으로 맞받아쳐주셨다.


 "뭐가 걱정이야. 그냥 하믄 되는 거지. 그냥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거지."

 "O사원 보면, 직급이 사원인데도 회의할 때 분위기 주도하고, 고객사 대응도 엄청 잘하잖습니까."

 "음, O는 난 놈이지. 내가 봐도 난 놈이야. 그렇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뭐 있나. 니는 지금 그 난 놈 밑에서 같이 일하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은 건데. 안 그나?"

 "음, 그렇네요. 근데 O선배랑 비교 안 하더라도 뭔가 뒤쳐지고 있고 그런 느낌이…"

 "솔직히 말하면. 우리 팀이 지금 다 너무 잘하고 있어서 그런 거지, H 니는 지금 100명 줄 세워서 등수 매긴다하믄, 한… 그래도 중간 이상은 하고 있는 거다. 잘하고 있다. 니 사수가 지금 1,2등 하고 있는 거고."


 팀장님께 이런 이야기까지 꺼낼 줄은 몰랐는데, 막상 속 시원히 얘기해보니 진작 상담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자신감이 없어서 업무 전화도 피하고, 동료들에게 물어봐야 할 내용도 안 물어보고 했었는데, 그런 내가 오히려 중간 이상은 하고 있다는 팀장님의 말이 그 어느 조언과 격려보다 힘이 되었다.  

    

폭우가 쏟아졌던 상해.

 물론 현실은 이렇게 아름답고 이상적이지만은 않았다. 고객사와의 미팅 당일. 나와 팀장님은 예상치 못했던 상해의 악천후와 교통체증 때문에 원래 예정돼있던 미팅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고객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준비한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며 회의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생지옥이 펼쳐졌다. 출장 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대본도 만들어서 시뮬레이션해보고 예상 질문에 예상 답변까지 준비해 갔지만, 역시 신입사원이 팀장급 회의를 준비하기엔 벽이 너무 높았다. 특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중국어 단어가 나오면서는 와르르 무너졌다.


"담당자가 뭐라는데?"

"어……. 그… 잠시만요. 다시 물어볼게요. 不好意思,我不太明白了。请再说一遍?不好意思。(죄송한데, 제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다시 듣는다 한들,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미 엄청 압박감과 긴장감, 부담감 때문에 서서히 말리고 있는 중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고객사 담당자가 천천히 얘기해줘도 도저히 그 용어가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미 얼굴은 홍당무, 등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땀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 됐어. 내가 얘기할게." 


 보다 못한 팀장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셔서는 불통의 중국어 대신, 만국 공용어인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회의실 문 옆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직접 그림을 그려가시면서까지 열과 성을 다하여 고객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내가 저렇게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과 동시에 부끄러움과 좌절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때의 기분이란. 많은 군중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채 벌거벗겨진 기분이랄까. 회의는 팀장님 주도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3시간 만에 무사히 끝이 났다.

 그 순간에는 그렇게 창피하고 세상 느껴본 적 없는 좌절감을 느꼈지만, 막상 회의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갈 때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내 역량 부족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내 힘으로 극복해내진 못했지만, 팀장님의 도움으로 어찌했든 해냈으니까. 팀장님 말씀처럼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이다. 두 번째 해외출장도 그렇게 무사히 다녀왔고, 그 신선한 충격 때문인지 한동안은 퇴사 욕구를 느낄 새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전 08화 첫 번째 퇴사 선언 : 책임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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