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본본쓰 Aug 29. 2020

입사 8개월, 몸과 마음이 지쳤어요.

(9) 사람 잡을 뻔한 몸살감기.


 다사다난했던 고객사 미팅을 끝으로 상해 출장 일정도 끝이 났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 일찍 호텔에서 나오려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너무 무거웠고 콧물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감기 걸맀나?"

"어제 에어컨 너무 세게 틀고 잔 것 같습니다. 콧물이 좀 나오네요."

"감기는 초반에 확 잡아야 돼. 이따 약 줄테니까 약 먹어."

"네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출장 때는 꼭 상비약 챙겨 다니고. 난 항상, 이 장이 안 좋아서 출장 다닐 때는 약 챙겨 오거든." 


 팀장님이 주신 감기약을 먹기는 했지만, 단순 해열제와 진통제로는 잡아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몸 컨디션은 빠른 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한국땅을 밟자마자 38도가 넘는 고열과 으슬으슬한 오한이 찾아와 결국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몸살감기에 제대로 걸리고 말았다. 보통 주말엔 부산에서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때는 정말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산 송장처럼 이틀을 끙끙 앓았다. 


"오빠, 괜찮아?"

"으어… 아니… 죽을 거 같은데…."

"회사에 얘기하고 쉬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아… 안돼. 출근해야 돼. 할 일 많아…."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일 생각밖에 없었나 보다. 하긴, 출장 다녀온 뒤에 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지난 첫 출장 이후에 경험해봤으니. 받은 메일함에는 수 백 통의 업무 메일이 '읽지 않음' 상태로 쌓여있고, 사무실 자리에는 내가 확인해야할 많은 양의 제품 샘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으며, 업무용 전화기에는 부재중 전화 몇 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눈에 훤 했다. 게다가 출장을 다녀왔으니 출장 정산이며 고객사 미팅에서 논의한 회의록 정리며,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 아픈 일들이 잔뜩이나 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감기 하나 때문에 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의지를 무력케 하는 것은 맹렬한 감기몸살이었다. 정말이지, 감기 하나가 사람 목숨을 잃게 할 수 있구나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느껴볼 정도로. 병원을 찾아가는 게 급선무이기는 했지만, 열이 펄펄 끓고 사경을 헤맨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응급실, 그것도 일요일의 응급실을 찾아간다는 건 내겐 감기몸살의 고통보다 나중에 청구될 병원 영수증이 더 무서웠다. (의료비도 회사에서 일부 지원해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결국, 병원 응급실을 포기한 채 일요일 오후를 고통스럽게 견뎌냈다. 문제는 월요일 출근이었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구미행 버스를 타야 했지만, 몸살로 인해 빳빳하게 굳어버린 몸을 움직이기가 힘겨웠고 터미널까지는 커녕 집 대문 밖을 나서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J책임님께 따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전화를 할까 싶었지만 그땐 전화를 거는 것도, 입을 떼서 한 마디 말하는 것도 힘들었다. 


'책임님, 저 몸살이 너무 심해서 그런데, 내일 하루 연차 좀 써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8개월 차 신입사원이 고작 감기몸살 하나 때문에 쉰다고 하니, 죄송한 마음이 더 앞섰던 것 같다. 안 그래도 바쁘고 정신없을 사무실에 팀원 하나 빠지는 건, 그것도 신입사원이 빠진다는 건 큰 죄악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생각들은 아주 크나큰 오산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 하나 없어도 회사는 아주 잘 돌아간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뒤이어 책임님에게서 답장 메시지가 왔다. 


'어~ 푹 쉬고. 팀장님한테는 말씀드렸으니까 몸조리 잘하고. 괜찮아지면 전화 한 번 줘리' 


 그렇게 해서 나는 월요일 연차를 쓰고 부산에서 하루 더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독한 몸살감기가 뚝딱 낫지는 않았다. 여전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서 몸부림쳤고, 이틀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병원을 찾아간 건 다음날 오전. 다행히 집 앞에 개인 의원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에 몸을 추스르고 찾아갔다. 책임님은 몸살 주사에 영양제를 타서 맞으면 금세 괜찮아진다고 하셨지만, 난 역시나 몇만 원 더 내는 게 싫어서 그냥 주사 한 대만 맞았다. 


"몸살이 심하시네요. 열도 상당히 높으시고. 약 처방해드릴 테니까 하루 세 번, 식전/식후 상관없이 드세요. 기름진 거나 커피는 피하시고, 물 많이 드시고."

"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의 당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는 겨우 죽 하나만 입에 댔다. 그마저도 서너 술 뜨고는 말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주사 약효가 조금 있었는지, 혈색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다 낫지는 않았던 터라 마음 같아서는 하루 더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루 더 쉬면 완전히 나을 것만 같았다. 안타깝게도 내 다른 이성은 회사가 있는 구미로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할 뿐. 아파도 거기서 아파야지. 결국, 책임님께 내일 출근하겠다는 전화 한 통과 함께, 일요일 저녁 막차를 타고는 구미로 돌아갔다. 

 


 

 "오, H. 출근했네? 괜찮나?"


 화요일 아침이었다. 분명 며칠 전 같이 상해 출장을 다녀온 팀장님은 저리도 멀쩡한데, 왜 나만 죽을 것 같은 감기몸살로 시달리는지. 아무 죄 없는 팀장님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어찌어찌 병자 같은 내 몸뚱이를 움직여 출근했고, 사무실에 앉아 잔뜩 쌓여있는 메일과 밀린 업무들을 처리해야 했다. 허나, 컨디션이 100%가 아닌 상태에서 격무를 처리하기란 고된 일이었다. 모니터 속 빽빽한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려니, 정신이 흐릿하고 몽롱해져 갔다. 단순히 독한 감기약 때문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3일을 쉬면서 겨우 끌어올린 컨디션이 평소의 20~30% 정도였으니. 그렇게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몸살 기운에 헤롱헤롱 대고 있을 때, 팀장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다시 병원엘 다녀오라고 말씀해주셨다. 

 

"야, 너 병원 가라. 안 되겠다. 주말에 주사 맞았나?"

"예에… 맞았습니다."

"수액 좀 맞아야 될 거 같은데? 수액 한 방이면, 금방 거뜬해진다." 

"어, 그래. H 안색이 많이 안 좋은데, 수액 맞으면 싸악 나아. 간호사한테 어? 영양제 오만 원짜리 맞으러 왔다고 하면 돼. 병원 갔다 와."


 실장님까지도 거들어주셨고, 결국 나는 하던 일을 모두 접고 회사 인근에 위치한 내과엘 찾아갔다. 이제는 나 역시도 돈 걱정보다 쾌차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을 했다. 실장님의 권유처럼 나는 간호사와 의사에게 5만 원짜리 영양제를 맞고 싶다고 얘기했고, 한 병실에 들어가 링거를 맞기 시작했다. 인생 첫 링거.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며 링거를 맞고 있다 보니, 내 처지며 몸뚱이가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이고,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다. 불과 2주 전에 선전 출장 갔다 오고, 그 자리에서 퇴사한다고 까지 말한 애가 돌아와서는 바로 상해 출장 갔다 오고, 일 걱정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니 몸살에 걸릴 수밖에. 몸이며 마음이며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와서야 이렇게 몸이 반응을 해주네. 아이고.


 속으로 혼잣말만 그렇게 되뇌었다. 나 자신한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 사실 이렇게 아프고 힘든 와중에도 다른 팀원들 생각하고 고객사 업무 걱정하느라, 정작 나 자신은 돌보지 못한 마음에서 그랬다. 회개와도 같은 혼잣말만 되뇌다가 잠시 잠이 들었고, 그렇게 한 2시간 여를 맞았을까. 

 영양제와 링거액으로 가득했던 링거팩은 어느새 홀쭉해져 있었고, 일어나라는 간호사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천근만근이었던 몸은 한결 더 가벼워졌고 낯빛도 서서히 분홍빛을 되찾아갔으며 입맛도 겨우 돌아왔다. 나흘이나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몸살감기는 그렇게 내 몸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예전의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입사 8개월의 신입사원의 하루하루도 지나가고 있었고. 



이전 09화 그냥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만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