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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02. 2020

스펙타클 품질 CS.

(11) 청두-대만 긴급출장 1편.

- 처음엔 가벼운 출장인 줄만 알았다.

 2019년 3월과 4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달로 기억한다. 앞선 이야기에서 나온 것처럼 첫 해외출장 이후 퇴사 선언, 그리고 그 직후 팀장님과의 상해 출장. 그 고된 일정과 쌓일 대로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렸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그 기나긴 2달의 대미를 장식한 일은 바로 청두에서 대만으로 이어진 긴급출장이었다. 

 

 4월의 마지막 주말. 짧은 휴식을 마치고 구미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다. 느긋하게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나는, 계속된 카카오톡 알림에 마지못해 카카오톡을 열었다. 그 근원지는 품질팀 단체 채팅방. 그 방에는 우리 팀원들이 다 있었는데, 대화의 주된 대상은 해외파트였다. 


팀장님 -  최종 고객 P사 제품 잘못 출하됐다고 하던데 확인됐나? 

J책임님-  네, 지금 확인됐고 아무래도 핸드캐리 대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님 - 이번 주 다른 고객 오디트(실사 내방) 있어서 O사원은 대응 안되는데. H 아직 부산인가? 

나 - 지금 버스 타고 구미 올라가고 있습니다.

팀장님 - 일단 H 출장 대기하고 있고. J책임은 이따가 나랑 카페에서 잠깐 만나서 처리 방향 논의해보자고. 


 아니나 다를까, 긴급 대응 이슈였다. 주말 동안 우리 회사에서 이미 출하시킨 제품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걸 먼저 인지했고, 최종 고객 측에서 생산라인 가동에 문제가 없도록 어떻게든 대체 제품을 보내야 했다. 물류 쪽으로는 도저히 스케줄 상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결국 핸드캐리 방법을 택했다. (수출하는 제품은 보통 전문 포워딩 업체를 통해 통관 및 수출 절차가 진행되지만, 핸드캐리는 말 그대로 사람이 제품을 직접 손으로 들고 통관하는 방법을 뜻한다.) 문제는 다음날 바로 비행기로 중국 본토로 날아가야 했는데 그 주 내내 다른 고객사 방문으로 인해 O선배가 아닌 내가 출장을 가야 했던 것. 가뜩이나 상당히 타이트했던 출장 때문에 지쳐있던 나였지만,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그게 내 일이기도 했고. 


 나를 태운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팀장님과 J책임님은 카페에서 긴급 회의를 진행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이 커지는 걸 막고, 빠르게 대응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구미에 도착해서 여느 때처럼 택시를 타고 기숙사에 도착하니, 팀장님과 논의를 마친 J책임님께서 정문으로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책임님 차에 올라탔고, 마치 비밀작전을 듣는 것 마냥 진지하게 얘기를 들었다.


"자, H. 잘 들어. 내일 우리는 청두 갈 거야. 청두 알제?"

"네네, 알죠. 가본 적은 없어요." 

"내일 오전에 제품 챙겨서 직접 핸드캐리 할 거야. 지금 할 일은 항공권이랑 청두 숙소 예약. 그 뭐냐, 여권 번호 아나?"

"네네, 저장해놨죠. 지금 바로 항공권이랑 숙소 찾으면 되죠?" 

"항공권은 내가 할 테니까, 숙소 먼저 찾아놔."


 묵을 만한 숙소가 없어서 결국 꽤 비싼 힐튼 호텔로 숙박 예약을 마쳤다. 책임님은 자리가 남아있는 항공편을 우연히 찾고는 빠르게 예매했다. 생각보다 일찍 항공권과 숙소 예약을 마치고는 기숙사로 올라갔다. '아, 씨. 뭔 놈의 회사가 제품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서 맨날 문제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출장 준비에 나섰다. 창고에서 미리 준비한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통관 처리를 위해 물류팀으로부터 관련 서류도 받아놨다. 오전 10시쯤 J책임님과 함께 회사를 빠져나왔고, 터미널에서 공항행 버스를 타고는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으로만 벌써 세 번째 해외출장이었다. 

 출발은 아주 순조로웠다. 출장 경험이 앞서 몇 차례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던 듯하고, 무엇보다도 이번 출장은 핸드캐리가 목적이었기에 제품 전달만 잘하고 오면 되는 출장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은 전보다 가벼웠고, 심지어는 청두라는 곳이 어떨까라는 기대감까지도 갖게 되었다. 

 

"책임님, 숙소 바로 가나요?"

"아니 아니, 제품 갖다 줘야지."

"네? 지금 벌써 열한 신데요?" 


 중국 청두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어느덧 한밤 중이었다. 무려 밤 11시. 위탁수하물로 보냈던 제품 박스를 찾아내고는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J책임님 말로는, 핸드캐리 과정 중에 종종 세관팀에서 제품을 확인한답시고 박스를 다 뜯어내거나 이런저런 귀찮은 질문들을 한다고 했다. 쓸데 없는 데에 시간을 쓸 수 없었기에,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그 큰 박스를 옷으로 가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작전을 수행했다. 다행히 걸리진 않았다. 

 시간은 매우 늦었지만, 24시간 내내 가동되는 생산라인이기에 최대한 빨리 제품을 전달해주어야 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공장에서는 제품별로 생산 일정이 계획되어 있고, 이 시간을 놓치면 다시 그 제품이 생산되는 날까지 투입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빨리 움직인 것이고. 마침 실무 담당자가 아직 공장에 남아 우리와 핸드캐리한 제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택시를 잡아 타고는 현지 공장으로 향했다.  

 

"책임님, 여기 맞을까요?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데…."

"나도 모르지. 택시기사한테 물어봐 봐, 제대로 가고 있는지."


 시간도 늦었던 터라 가로등 불빛 없이 도로는 어둑어둑했고, 낯선 곳이니 더 무서웠다. 다행히 제대로 찾아온 현지 공장. 처음으로 디스플레이 패널을 생산하는 최종 고객 공장까지 와보게 되었다.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도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였다. 그래서인지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대륙의 스케일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 아쉽게도 공장 내부로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미리 연락했던 담당자에게 제품을 전달해주고는 호텔로 향했다. 

밤 12시, 청두 힐튼 호텔.

 아주 완벽한 출장이었다. 임무수행을 완벽히 해냈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나를 흥분케 했고, '이 맛에 품질 업무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엄청나게 스펙타클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 전혀 예상치 못한 출장 연장.

 "아니, 왜 오라는 건데! 그깟 전산 시스템 하나 설명할라고, 돈 백 만원 더 쓰고 신주까지 가야 돼?!"

사단이 났던 청두 호텔.

 다음날 오전. 고객사 담당자 S와 전화회의를 하는 도중, J책임님이 폭발했다. 제품 전달은 무사히 완료했고 최종 고객 P사에서 생산하는 데에 그 어떤 문제도 없었지만, 우리의 실질적인 고객사 F사는 해당 품질 이슈가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추후 이런 이슈를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할 지에 대해서 꽂혀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의 비즈 구조는 이러했다. 내가 몸담은 L사 (생산자)-디자인하우스 F사(주문자)-최종 고객사 P사(사용자). 고로 실질적으로 우리가 대응해야 할 고객은 F사였다. 


"전산 오류 때문에 제품 생산에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을 계속 하는데… 도통 알아먹지를 못하네요…."

"아니 내부 전산 다 설명해주고, 사진도 보내주고 하는데 이걸 이해 못한다고?! 아, 진짜 답답하네에."

"직접 와서 설명하라는데요?" 

"F사? 대만 신주 와서 얘기하라고?"

"네네. 뭔가 다 불만족스럽나 봐요." 

"하, 미치겠네. 진짜. 일단 알겠다고 하고 끊어봐. 팀장님이랑 얘기 좀 해보께."

"네네." 


 전화로 주고받는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내 중국어 실력에도 문제가 있었고. 하지만 난 최선을 다 했다. 내가 아는 단어란 단어, 용어란 용어는 다 썼고. 심지어는 사전을 켜서 단어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설명했으니. 본질적인 문제는 그냥 고객사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갑질도 이런 갑질이 어디 있나. 처음에는 항공기가 없어서 고객사가 있는 신주(新竹 ; 대만 북부에 위치한 한 공업도시)까지 갈 방법이 없다, 한국 돌아가면 바로 화상회의를 하겠다 호소했지만 그것도 통하질 않았다. 책임님은 줄담배를 뻑뻑 피워대셨고, 호텔 객실은 희뿌연 담배연기로 숨쉬기 조차 힘들었을 정도였다. 나 또한 도저히 협상의 여지가 없는 담당자 S의 태도에 머리를 쥐어뜯느라, 손에는 한 움큼 머리카락이 뜯겨 나왔다. 책임님이나 나나 입에서는 욕설이 절로 나왔다. 


"아, XX! 이거 중국어로 욕할 수도 없고!"

"야, 욕해. 욕해. 중국어로 XX을 뭐라하냐."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을'. 결과적으로 나와 책임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청두-인천 항공편을 취소하고, 청두-선전-타이베이로 이어지는 항공편으로 예약을 변경했다. 나중에 출장비 정산할 때 보니, 이 예약 변경 금액이 무려 인당 120만 원에 달했다. 취소하고 새로 예약을 해야 했는데, 정말 항공편이 없었기 때문.


 어찌했든 우리는 회의를 마치고 청두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뒤, 선전행 항공기를 타러 청두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품질 직무… 그렇게도 순조로워 보였던 1박 2일 청두 출장은, 대만으로까지 이어지는 4박 5일 장기 출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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