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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04. 2020

성장한 내 모습을 발견한 시간.

(12) 청두-대만 긴급출장 2편. 


 경유지였던 선전에선 굉장히 짧게 머물렀다. 비행기 환승 시간이 매우 빡빡했었기 때문. 불과 한 달 전에 왔었던 선전인데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환승 대기 시간에는 잠시 공항 게이트를 나갔다 오기도 했는데, 그때 선전의 날씨와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4월 말이었지만 선전엔 이미 여름 더위가 찾아왔고, 야자수가 펼쳐진 공항 공원 위로는 많은 항공기들이 분주히 이륙하고 있었다. 

선전 국제공항에서의 한 컷.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금세 대만 땅을 밟았다. 대만으로의 출장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 '대만'의 이미지는 너무나 평화롭고 낭만 가득한 여행지였다. 수년 전 친구와 함께 갔었던 대만. 대만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많은 대만 로맨스 영화처럼 나도 저런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차분한 일본의 거리와 시끌벅적한 중국의 느낌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 출장 이후로 대만은, 다시는 밟고 싶지 않은 땅이 되었다. 군대에서 흔히 '전역하면 군 복무했던 곳을 향해서는 소변도 안 본다'라는 말처럼, '퇴사해도 대만 쪽은 쳐다도 보기 싫어'졌다. 다행히 이때까지는 대만을 오랜만에 찾은 느낌이라 약간은 상기된 기분이었다. 항상 그렇듯, 앞으로 펼쳐질 일은 상상도 못 하고 말이다. 

 타이베이에 있는 타오위엔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고객사 본사가 위치한 신주(新竹)로 향했다. 타이베이에서 신주까지는 차를 타고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신주는 북부의 공업도시. 대만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정도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반도체 업체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바깥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덧 호텔에 도착했다. 


"오, J책임!"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하던 도중, J책임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발팀의 K책임님이었다. 사실 이번 품질 이슈의 문제는 개발팀에서 관련 정보를 잘못 설정했고 그 오류가 그대로 제품 실물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었는데, 이런 이유로 개발팀 담당자인 K책임님이 호출된 것. 


"언제 오셨어요?" 

"나? 한 1시인가? 부산에서 비행기 타고 왔지. 아 근데 일찍 왔더니 호텔 체크인 시간 안됐다고 들여보내 주지도 않더라고. 여기 계속 앉아있었어." 

"체크인은 하셨어요?" 

"어. 방금 했지. O사원 안 오고 H씨가 왔네?"

"아, 네네. 중국 청두에서 바로 넘어왔어요."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눈 뒤, 각자 업무를 위해 객실로 들어갔다. 배정받은 객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완전히 뻗어버렸다. 이동하는 것만 해도 이렇게 힘들 줄이야. 잠시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다음날 고객사와의 미팅에 쓰일 자료를 늦은 시간까지 준비하고는 잠에 들었다.

호텔에서 바라본 신주의 밤 풍경.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미팅 준비에 나섰다. 나를 포함하여 J책임님, K책임님까지 3명이 호텔 식당에 모여 조식을 먹고 바로 고객사 본사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위치도 모르고 해서, 고객사 담당자 명함을 꺼내어 택시기사에게 보여주고는 그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마침 오전 출근시간대와 겹쳐서 조금 도로가 막히기는 했지만, 담당자 S보다는 일찍 본사 빌딩에 도착했다. 


"책임님, S 아직 안 왔다는데요?" 

"지금 몇 신데?" 

"9시 10분이요." 

"아, 얘네 출근 9시 반까지인가 보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본사 건물 앞에 어물쩡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S가 도착했다. 우리를 이 먼 곳까지 이끈 장본인이자,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不好意思,进去吧。(미안해요, 들어가죠.)"


 우리 회사의 주요 고객사인 F사의 본사에 처음 발을 들였다. 상당수 직원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시간이어서인지, 불도 켜지지 않은 사무실엔 몇몇 직원들 빼고는 많은 자리가 비어있었다. S는 우리 일행을 한 회의실로 안내했다. 미팅이 임박하자 극도의 긴장감과 부담감을 느꼈다. 사실 그동안 해왔던 어떤 회의보다도 떨렸던 것 같다. 그 이유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F사 담당자인 S와 1대 1로 진행하는 첫 회의였기 때문. 그 이전에도 S와는 전화나 메신저로 많은 대화를 해봤지만, 직접 이렇게 회의를 주관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통역을 해야 하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옆에 계신 두 책임님은 중국어를 못하시니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고, 통역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내 귀와 입에 이 회의의 귀추가 달려있던 셈. 둘째, 타 부서 담당자와 함께 한 고객사 미팅이었다는 것. 사실 내 중국어 실력이 개차반인 것은 우리 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아무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다른 부서 소속의 K책임님이 함께 한 자리여서 부담감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종종 회사 동료들로부터 'H씨, 중화권 고객사 담당이면 중국어 잘하겠네요?'라던가, '중국어 이거 다 알아듣죠?'라는 등의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나 스스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회의를 망치고 회사로 돌아가서 'H씨, 중국어 엄청 못하던데. 이번에 회의도 망치고 왔잖아.'라고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이것 저것 다 따지기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미 고객사 본사 회의실까지 들어왔고 이제 해야 할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는 것. 


 예상대로 회의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하마터면 대형 품질 이슈로 커져서 공장 생산라인이 중단될 뻔한 품질 이슈였고, 이 때문에 고객사는 뿔이 잔뜩 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이번 이슈는 개발팀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터라, K책임님이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면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시스템에 해당 정보를 기입해서 설정해놨는데, 그걸 아무래도 사람이 하다 보니까 실수를 한 것 같거든요. 어제 전산은 다 수정해놨고 추후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어… 잠시만요. 음… 在我司内部系统上……导入相关信息。但是… 人员直接导入这些信息 (우리 회사 내부 전산에, 넣는다 관련 정보를. 그러나, 직원이 직접 넣는다, 그 정보들을.)" 


 아주 느릿한 속도로, 내가 쓸 수 있는 단어란 단어는 총동원해서 어렵게 한 마디 한 마디 통역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입과 귀가 터지기 시작했고, 그 덕에 비교적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고객사 담당자 S가 얘기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경우도 많았지만, 어찌어찌 알아듣고는 책임님 두 분께 통역해드렸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하지만, 통역이라는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이 미팅의 본질적인 목적인 품질 이슈에 있어서는 양사 간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다른 상황이었다. 이견을 좁히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양보해야 했고, 그 대상은 당연히 을, 우리였다. 


 "아, 알겠다캐라, 그냥. 다 한다고. 너거 원하는 거 다 해줄테니까 시간만 조금 달라캐." 

 "아, 네네. 那,我们…按照贵司的要求处理这次错误问题一下。但是… 我们也需要一段时间,请给我们时间。(그러면, 저희가… 귀사 요청에 따라 이번 이슈를 처리할게요. 근데, 저희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시간을 좀 주세요.)" 

 "好,到明天下午。(좋아요, 내일 오후까지.)" 

 

 진짜 속으로 '미친놈인가'했다. 시간 좀 더 달라고 했더니, 꼴랑 하루 주고 내일 오후까지 발생 원인부터 예방 대책까지 싹 정리해서 달라고 하는 게 말인가. 더 웃긴 건 마치 엄청난 아량을 베푸는 듯한 그의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콧대에 주먹 한 방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별 수 없었다. 이래서 '을'은 늘 서럽다. 


 "到明天下午?不可以。我们明天上午会去韩国。怎么可以寄出给你们完整的报告?(내일 오전까지요? 못해요. 저희 내일 오전에 한국 돌아가는데, 어떻게 레포트 완성본을 보내요.)" 

 "那,周末之前。必须给我们报告一下。 OK? (그러면, 주말 전에 반드시 레포트 보내줘요, 알겠죠?)" 

 "OK. 谢谢!(오케이, 고마워요!)"


 극적으로 마감기한에 대해 합의할 수 있었고, 그 정도면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책임님과 나는 판단했다. 3시간에 걸친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회의를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중간중간 통역 문제로 회의가 정체될 때마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손에 땀이 별로 없는 체질이었음에도, 다한증이 있는 것처럼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수고했어요. H씨." 


 회의실에서 나오려는데, K책임님이 어깨를 두드려 주며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스스로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이야, 진짜 수고했다. 힘들었는데 잘 해냈구나.'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살얼음판 걷던 회의였지만, 끝나고 나니 이빨을 드러내며 싸웠던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이놈의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공과 사의 구분이 이렇게 확실한 일이 또 있을까. 

신주 우육면 맛집에서.

 점심식사는 S와 함께 우육면 맛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비교적 편한 대화가 오갔다. 원래 담당자였던 P는 감기로 인해 조퇴를 했다는 얘기, S의 약혼자에 대한 얘기, 신주와 타이베이에 대한 얘기 등등. 물론, 중간중간 통역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냥 허허허 하고 웃어넘겼지만, 그래도 분위기 자체는 나름 괜찮은 식사 자리였다. 우육면 맛도 아주 훌륭해서 더더욱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고.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S가 계산을 하려 하자, J책임님은 그래도 고객이라며 우리가 계산한다고 S를 말렸다. 


"아, 됐다 됐다. 우리가 계산한다캐." 

"S,我们结账一下。(저희가 계산할게요.)" 

"不不不,今天我请吧。(아녜요, 아녜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한적한 오후, 신주 거리.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S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고, 나와 J책임님 그리고 K책임님은 머리도 식힐 겸 소화도 시킬 겸 호텔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아주 편한 마음으로 대만의 길거리를 걷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그동안은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적성에 대한 고민, 퇴사에 대한 열망 등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했었다면, 이번 출장과 고객사 미팅 후에는 약간의 자신감과 교훈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동료들보다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늘 자신감 없었던 나였다. 작고 사소한 고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덧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나를 짓눌렀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매일 같이 고객사 독촉 전화에 시달리는 악몽을 꾸었고,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 그럼에도 묵묵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퇴사 선언 후에도 바뀌지 않은 내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렇게 묵묵히 하다 보니, 이날처럼 힘들긴 했어도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회의를 통해 느꼈던 가장 큰 성취감은 이전 회의들보다 조금은 능숙해졌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 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스스로 성장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큰 교훈을 얻기도 했다. 팀장님이나 J책임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일은 어떻게든 처리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종국에는 어떤 일이든지 끝이 있었다. 이번 이슈도 몇 달 뒤 되돌아보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끝이 났다. 불과 며칠 전 청두 숙소에서 줄담배 뻑뻑 피우시던 책임님 그리고 머리털 쥐어뜯던 나는, 어느덧 회사로 돌아가 이 이슈를 끝마치고 다른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감과 큰 교훈을 얻은 나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4박 5일 일정으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이상한 출장도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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