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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15. 2020

조금 우당탕탕해도 괜찮아.

(14) 일주일 동안 나 홀로 지킨 사무실.  

 두 번째 퇴사 선언은 처음 퇴사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 지 겨우 3달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선언 때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퇴사 선언 이후 역시 내 삶과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바뀐 것이 전혀 없었다. 연이은 나의 퇴사 선언에 피로감을 느낀 것인지, 팀장님과 J책임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업무에 있어서 고객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대응 업무 최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게 했고, 그 외에 크고 작은 배려를 해주시기는 했지만 난 그런 배려 아닌 배려가 더 불편했고 거북했다. 난 그저 '그래, 좋아. 그러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데 말이다. 나조차도 두 번째 퇴사 선언을 그저 충동적인 사건으로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다시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사무실을 지킨다고?!

"추석 끝나고서부터는 엄청 바쁠끼야. 국내나 해외나, 고객사도 다시 일하기 시작한다고 정신없을 꺼고. 저번에도 얘기했는데, 내랑 J책임이랑 O사원은 수목금 대만 출장 갔다가 그다음 주는 월화수 선전 갔다 올 거니까 급한 건 카톡으로 바로바로 연락 줘."

 

 추석 연휴를 앞둔 월요일.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품질 주간 회의. 팀장님은 명절 잘 쇠라는 말씀과 함께 연휴가 끝난 뒤의 일까지 대비하라며 당부하셨다. 연휴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면 되는 것이지만, 그 뒤에 몰아칠 일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품질팀 내 해외파트는 J책임님, O선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줄곧 업무를 해왔었다. 업무의 경계나 담당 고객사 구분 없이 내가 못하는 일이 있으면 J책임님 또는 O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반대로 그 두 사람이 너무 바쁘거나 하기 힘든 일이면 내가 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시원시원하게 처리가 되었고, 그 셋 중 한 명이라도 없는 날엔 굉장히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었다. 물론 그동안 하루 이틀 정도 띄엄띄엄 자리를 비운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1주일이 넘는 오랜 시간, 그것도 팀장님까지 포함해서 세 명 모두 자리를 비운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덜컥 겁이 난 것이다. '와, 이거 주말까지 끼면 거의 8일인데… 분명 일 터진다 일 터져.'


 사무실로 다시 돌아온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O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출장 가는 거요… 너무 긴데. 뭐 때문에 가는 거예요?"

"대만 가는 거는 신규 고객사 진입 때문에 가는 거고, 선전 가는 거는 C사 알제? C사 이슈 터진 거 협의 보러 가는 거."

"팀장님이랑 책임님도 다 가시는 거예요?"

"어어. 이번엔 좀 중요한 미팅이라 다 가셔야 할 걸? 와, 걱정되나?"

"쪼끔…? 세 분 다 출장 가신 적은 처음이라…"

"괘안타. 뭔 일 있으면 카톡하믄 되지."


 '그래. 아예 연락이 안 닿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급한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걱정하는 건 무의미하고 쓸 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우선은 추석 연휴를 잘 보내고 오기로 했다.  




 찰나와 같던 추석 연휴 4일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회사. 출장 전 이틀 동안은 J책임님이나 O선배나 나 홀로 지킬 사무실이 걱정되었는지 이것저것 인수인계를 해주느라 정신없었다.


"H, 일로 와봐."

"네네."

"이번에 내랑 O랑 자리 비우는 시간이 좀 길디. 알제?"

"네, 다음 주 수요일까지 안 계신 거죠?"

"어어. 자, 내 없을 동안에 연락 올 만한 거 미리 쫌 알려주께."


 J책임님은 아크릴 보드에 A4 이면지 한 장을 끼우고선, 늘 그렇듯 검은색 사인펜으로 순서를 매겨가며 인수인계를 해주셨다.


"어… 먼저. N사꺼 SR 두께 측정한 거 결과. 그거 테스트 업체에서 받으면, 내 저번에 준 레포트 있제. 거랑 포맷 똑같이 해가 정리해놓고. 보내진 말고. 내 갔다 와서 확인하고 보낼라니까."

"네네."

"그리고… 아, 그 F사꺼. 그 뭐냐…"

"잉크 이슈요?"

"어어. 그거도 일단 이번에 문제 있는 제품 싹 다 리스트업 해놓고. 그거 절대 고객사 오픈하면 안된디. 내부 공유만 일단 해놔라."

"네네."

 

 이면지에 써 내려간 업무 목록의 번호는 어느덧 6을 넘어가고 있었다. 'O선배 업무도 할라믄, 머리 깨지겠는데'라고 생각할 때쯤 겨우 사인펜이 멈추었다.

 

"됐따. 일단 이 정도로 하고. 뭔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겠제?"

"네네. 아 근데 회의 중이시면…"

"그땐 안되지. 안 받으면 회의하고 있다 생각해라."


 이어서 O선배도 나를 불러서는 회사 로고가 박힌 자주색 업무용 다이어리에 이것저것 써 내려가며, 해야 할 일이나 놓치면 안 되는 일들을 알려주었다. J책임님의 6개 업무, O선배의 5개 업무. 도합 11개. 자잘한 것도 몇 개 있었지만, 대부분 이미 이슈가 되었거나 아니면 이슈가 될 만한 굵직굵직한 업무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주 다행인 것은 그들이 대만/선전에 넘어갔을 때의 일은 내가 손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예를 들면, 신규 고객사 N사에 내방하게 되었을 때, 나는 N사 업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 담당자 셋이나 고객사에 내방해서 관련 이슈들을 처리하고 있을 테니까.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많았다. 내가 해야 할 업무도 꽤나 많았었고. 덕분에 업무 일지를 적어놓는 다이어리엔 빨간색 글자들로 가득 채워졌다.


업무가 얼마나 많았으면, 온통 빨간색 천지.


 마침내 찾아온 그날. 이날부터 나는 무려 6일 간 홀로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이른 비행기 시간 때문에 팀장님, 책임님, O선배 세 명 모두 회사가 아닌 공항으로 출근을 했고, 내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해외파트 자리는 휑하니 모두 비어있었다. 여느 때처럼 노트북을 켜서 아웃룩 메일함을 쭉 훑어보고 챙겨야 할 업무들을 하나씩 체크해나갔다. 생각 못한 업무들이야 늘 있었지만, 이날은 왠지 평소보다 더 많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아침부터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부터 부재중인 J책임님과 O사원을 찾는 전화가 빗발쳤다.  


"QA팀 H사원입니다."

"어? J책임 자리로 전화했는데?"

"오늘부터 출장이셔서 자리에 안 계세요. 어떤 일 때문에…?"

"아, 지금 여기 1층 백두산 회의실에서 회의 있는데, O사원도 없죠?"

"네네, 책임님이랑 같이 출장 갔어요."

"음, H씨 지금 참석 좀 가능해요?"

"아, 넵.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회의 안건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업무 다이어리며 펜이며 노트북을 챙겨서는 1층 회의실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도착한 회의실에는 이미 다른 부서 담당자들로 가득했고, 나는 허리를 숙인 채 조심스레 회의에 참석했다. 아무 내용도 모른 채 회의 중간에 들어와서 멀뚱멀뚱 앉아있는데, 개발팀 K책임님으로부터 질문이 훅 들어왔다.


"H씨, 이번 N사 신규 퀄 레포트 진행하는데, 제품 출하 일정이랑 출하 최소 수량 알고 있어요?"

"아…"


 안타깝게도 이번 회의 내용은 J책임님으로부터 인수인계받지 못한 내용이었기에,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신규 고객사와의 연락 업무는 모두 J책임님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던 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책임님들과, 심지어는 팀장님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 부분은 제 관할이 아니라 답변드리기가 어렵네요.'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 순간 문득 생각난 P형님의 꿀팁. '이럴 때는 그냥 확인하고 공유해드리겠습니다 라고 얘기하면 되는 거야.' 

 

"확인하고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확인하고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꼭 좀 알려줘요."


 그렇게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다. 평소 같았으면, 어버버 하다가 어정쩡하게 끝났을 대답이었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P형님의 조언이 떠오른 덕분에 회의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른 업무가 쌓여 있었기에 다이어리에만 적어놓고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다. 다시 돌아온 사무실.


"H야, 전산팀 K책임님한테 전화 왔드라. 680으로 전화하면 될 걸."

"K책임님이요? 전화 올 일이 없는데…"

 

 동기 J형님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전화를 당겨 받은 모양이었다. 이 역시,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업무 중 하나였고 그 내용도 인수인계 리스트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책임님, QA팀 H사원입니다. 전화 주셨다 그래서요."

"아, H씨. 딴 게 아니고. O사원이 FTP 서버 관련해서 로그인 안 되는 거 있다 그러던데, 혹시 내용 알아요?"

"아… 아뇨. 따로 들은 건 없는데…"

"아, 그래요? 혹시 될지는 모르겠는데, 고객사 담당자한테 서버 주소 좀 다시 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쪽 문제가 아니라, 그쪽에서 주소를 잘못 준 것 같아서."

"아, 네.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죠. 제가 한번 확인해서 알려드릴게요. 전화 다시 드리면 될까요?"

"아뇨아뇨. 그냥 메신저 쪽지로 알려줘요."

"네네, 감사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난이도에 있어서는 최하에 속하는 업무였다. 그래도 전산 쪽은 그나마 알고 있는 부분이 많기도 했었고, 그냥 서버 주소만 다시 물어보면 되는 간단한 업무였기에.

 그 뒤로도 J책임님과 O선배를 찾는 전화는 계속 울려댔고, 나는 내 업무는 모두 한 곳으로 치워 놓은 채 전화를 당겨 받기 바빴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고, 그저 업무 하나하나 해치우기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간단한 업무가 있었는가 하면, 혼자 처리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은 사이즈의 업무도 더러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확인하고 공유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이 말은 거의 치트키처럼 사용되어서, 모두가 알겠다고 했고 눈앞에 있는 급한 일은 우선 덮어놓고 더 급한 다른 업무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확인하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건, J책임님과 O선배가 돌아오고 나서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 엎친 데 덮친 격, 그래도 어떻게든 해냈다!

 어찌어찌 일은 처리되어 갔다. 정신없고 힘들긴 했지만, 걱정한 것에 비해서는 순조로운 날들이 지나갔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하루는 업무를 일찍 마치고 사내 풋살장에서 풋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악!"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고자 기쁜 마음으로 풋살을 하던 도중, 다른 동료와 충돌이 있었고 그 순간 무릎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단순 타박상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뛸 정도의 수준은 아니어서 경기를 일찍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음날, 걷지 못할 정도의 통증을 느낀 나는 출근해서도 통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병원엘 찾아갔다. 엑스레이며 MRI며 정밀검사를 받았지만, 정밀검사 결과는 수 일이 지나야 나오는 관계로 우선은 반깁스를 하기로 했다.


응급차에서도 일, 일, 일.

 

 혹시 몰라 노트북을 가져갔었는데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MRI 촬영을 위해 구급차로 이송되던 중에도 계속해서 업무 요청이 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옆 부서 C책임님이었다. 업무 하는 데에 있어서는 많은 도움을 받아왔었고 개인적으로 친하기도 해서 굳이 전화받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냥 전화를 받았다.


"네, 책임님."

"H, 어제 얘기한 불량 처리 절차 정리 자료, 지금 좀 보내줘라."

"저 지금 병원 가는 중인데, 갔다가 회사 복귀해서 하면 안 될까요?"

"아니, 고객이 지금 바로 보내달라는데 어떻게 그러냐. 바로 보내줘."  

"지금 응급차… 하… 알겠어요."


 아니, 발 다쳐서 병원 가고 있는 걸 뻔히 아는 사람이 고객 요청이랍시고 막무가내로 자료 보내달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진짜 아픈 것도 화나고 서러운데, 사정 다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정이 뚝 떨어졌다. 아무튼 병원에 도착해서 자료를 C책임님에게 보내주었고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지었다.




 이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제품 첫 출하 당일 아침에 라벨이 잘못 출력되어 아침부터 전산팀을 뒤엎기도 했고, 출하 성적서 없이 제품 출하를 나간 대형 이슈도 있었고, 고객과 약속한 자료가 나가지 않아 담당자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J책임님이나 O선배에게 굳이 전화하진 않았다. 전화해도 당장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굉장히 바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 잘 처리되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일하다 보니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팀장님과 J책임님, 그리고 O선배는 다시 회사로 출근했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나마 보고했다.


"어? 너 다리 왜 그래?"

"아… 그 풋살 하다가 다쳐서요. 무릎 다쳤는데, 괜찮아진 것 같아서 그냥 깁스 풀까 생각 중이에요."

"그냥 풀어도 되나?"

"별로 아픈 것 같지도 않고, 귀찮기만 해서요. 아, 안 계신 동안 쫌 일이 많았는데…"

"별일 없었제?"

"네. 뭐 딱히…"

 

 별일이 참 많았지만 일일이 다 얘기하기도 입 아프고, 얘기해서 뭐하나 싶어서 그냥 업무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만 말씀드렸다.


"고생했다. 바빴을 텐데 혼자 업무 다 하느라고."

"아, 아닙니다. 우당탕탕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더라고요."

 

 그랬다. 분명 이 일주일 전만 해도 '이 업무들을 홀로 잘 처리해낼 수 있을까.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잘 대응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로 가득 차 있던 나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름 괜찮게 혼자 잘 해냈던 것이다. 사실 그 이전부터 나 스스로 평가하기를, 나라는 사람은 늘 능력 있는 J책임님과 O선배의 그늘에서 보호받은 존재라고 생각해왔었다. 어렵고 궂은일은 그 두 사람이 늘 담당해왔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편하고 쉬운 일만 해왔다고 느꼈다. 사실이기도 했고. 이 일주일 동안 나는 아주 고독하고도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두 사람이 없이도 혼자서도 어떻게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성취감과 자신감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고. 조금 우당탕탕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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