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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18. 2020

내가 사수라니!

(16) 우리 팀에 신입이 들어왔다. 


 입사 후 계절이 한 바퀴 돌아, 어느덧 해가 길어진 겨울이 찾아왔다. 퇴근길 저녁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으로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입사 개월 수로는 1년 3개월을 막 채웠을 때였다. 이 무렵 팀 내부에선 신입사원을 뽑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사실 그 몇 달 전부터 추가 채용이 있을 거라는 말이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번에 오가는 이야기는 꽤 실현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이미 복수의 지원자로부터 서류 지원을 받아, 위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계획에 있었다. 그 신입의 자리는 내 옆자리였고, 그 말인즉슨 내가 사수가 될 것이라는 것. 그때까지도 나는 총 8명이 소속되어있는 팀의 막내였는데, 그 때문에 새로운 막내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부담감이 더 크게 와 닿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더 편한 막내 사원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깜냥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행님, 이번에 신입 들어온다는 데요?" 


 사석에선 O선배에게 늘 형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그게 더 편했고, 말 그대로 사석이었으니까. 신입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O선배와도 몇 번 얘기를 나눠봤던 나였다. 


"어어. 뭐, 들어온다데. 팀장님이 입사지원서 보고 계신 거 같드라." 

"하. 아직 자신 없는데." 

"뭐가?"

"신입 들어오면 제 밑으로 들어오는 거잖아요. 지금 일도 많은 데다가 아직 누구 가르칠 실력도 안 되는 거 같아서." 

"처음에만 쫌 빡세고 바쁘지. 니 처음 들어왔을 때, 내도 그랬다." 

"아, 그러네. 그때 어땠어요?"

"어떠긴 뭘 어때. 나도 그때 니랑 똑같았다. 아는 거 별로 없지, 일은 많지, 니 델꼬 다녀야 하지. 이러니까 완전 죽겠드라. 근데 지금은 잘하고 있다이가. 맞제?" 


 잠시 생각해보니, O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었다. 입사하고 1년도 채 안돼서 사수였던 L선임님이 퇴사하셨고, 인수인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 뒤로는 줄곧 J책임님과 O선배 둘만 남아 그 많은 일을 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내가 부사수로 들어왔었고. 그 막막함과 부담감은 아마 지금의 나보다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힘들기도 많이 힘들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무렵 우리 해외파트는 업무에 있어서 굉장히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언제 들어오는지 알아요?" 

"글쎄…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들어오지 않으까?" 

 


 사수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부담감을 느낀 동시에,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일상에도 어느 정도 자극이 되었다. 내가 담당하던, 루틴하면서도 단순한 업무들은 곧 신입사원의 몫이 될 것이었고, 이를 대비하여 인수인계할 업무 노트도 따로 만들어 놨다. 내부 공정이며 중국어 업무 부분에서도 많이 부족하다는 걸 자각하고서는 평소보다 많이 제조 현장에 들어가 하나라도 더 배우고자 발로 뛰어다녔고, 고객사 담당자가 많이 쓰는 용어를 따로 중국어로 스터디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업무 실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았고 부담감은 서서히 커졌다. 


 '맙소사. 내가 사수라니.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지. 입사한 지 1년 3개월 되긴 했지만, 아직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훨씬 많고 내부 공정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누가 누굴 가르쳐. 내가 입사했을 땐 뭐했었지? 뭐가 제일 궁금했지? 뭐부터 배웠었지? 큰일 났다. 진짜 발등에 불 떨어졌다.' 


 이런 생각으로 밤잠 설치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마침내 신입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L사원이라고 합니다." 


 데자뷔처럼 1년 3개월 전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과 잔뜩 힘을 준 머리로, 긴장하면서도 얼떨떨한 얼굴로 일단 인사부터 하는 쌩신입. 신입은 팀장님부터 해서 J책임님과 H책임님 그리고 선배들을 지나 내 자리에 와서 인사를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만남. 


"여기는 H사원. 사수 될 사람이에요." 

"안녕하십니까. L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네. 안녕하세요. H라고 해요." 


 멋쩍게 통성명만 하고 그 신입사원은 배정받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우리 팀 쪽에는 이미 만석이라 QC팀이 있는 쪽, 내 맞은편 자리로 배정받았다. 이때부터 일이 손에 안 잡히기 시작했다. 신입사원이 들어온 데다가 내 부사수이기도 하니 뭔가 챙겨줘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J책임님이 나와 O선배, 신입사원 L을 불렀다. 


"차 한잔 하자. 고고."


 나로서는 처음 받은 신입사원이었고 다른 팀원들에게도 꽤 오랜만에 받은 신입이라, 우리 모두는 각자 궁금해했던 것들을 L에게 물어보았다.  


"집이 어데고?" 

"대굽니다." 

"나이는 맻 살?"

"올해 스물여섯입니다." 

"H, 니랑 몇 살 차이지?" 

"제가 올해 스물여덟이니까, 두 살 차이네요. 중국어는 어떻게 공부했어요? 유학? 교환학생?"

"아, 대학에서 중국어 전공했고, 교환학생 잠깐 갔다 왔습니다." 

"군대는?" 

"면제받았습니다." 

"엥, 면제? 아, 임마 이거 안되긌네. 크크크. 내랑 O사원은 해병대 나오고, H는 육군 나왔디." 

"아, 저는 다리 다쳤어서 못 갔습니다."

"크크크, 여자 친구는 있고?" 

"아, 아뇨. 없습니다." 

"아부지 뭐하시노?"

"교직에 계십니다."

"집에 화장실 몇 개고. 크크크크."

"화장실이요?"

"아이다, 장난이다. 크크."

"오늘 출근할 때는 뭐 타고 왔어요?" 

"기숙사 룸메이트 중에 책임님 한 분 계시고, 사원 한 분 계셔서 같이 타고 왔습니다." 

"오, 누구?" 

"그… 성함은 잘 모르겠는데, 전산팀이랑 어쎄이팀인가…? 잘 모르겠네요." 

"첫날인데 뭐 알겠나. 됐다, 드 가자."


 이것저것 물어볼 게 한참이나 남아있었지만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우리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신입사원이자 부사수를 받아서인지, 나도 덩달아 괜스레 긴장이 되면서 업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날은 그냥 L을 데리고 회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뭐하는 곳인지,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 등등 신입사원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이날은 퇴근도 평소보다 훨-씬 빨리 하게 되었다. 나도 그랬지만, 신입사원들은 입사 일주일 간 그냥 칼퇴근을 시켜준다. 앞으로 일할 날이 많은데 뭐하러 처음부터 일을 열심히 하라고 하겠는가. 가뜩이나 뭐가 뭔지도 모르는 백지상태의 신입에게. 첫날이라 밥은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L과 함께 택시를 타고 퇴근을 했다. 사수와 부사수의 첫 식사는 치맥으로 결정했다. 


"첫날 출근해보니까 어때요?"

"그냥 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얼떨떨하죠? 어떻게 입사했나 싶고." 

"네네, 신기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저도 처음 입사했을 땐, 클린룸 들어가는 것도 신기하고, 반도체 제품 만드는 거랑 스코프 보는 것도 신기했는데, 지금은… 어휴. 조금 지나면 지겨울 걸요?" 

"아, 그런가요? 하하하. 아, 참. 말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 그래.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테니까 말 놓을게, 그냥." 


 이어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과 시원한 생맥주가 나왔고, 식사를 하며 조금 더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주로 나눈 대화의 소재는 대학교 시절 이야기, 가족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회사생활 이 정도였다. 


"선배님, 혹시 팀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팀 분위기? 어떤 거 같애?" 

"음… 잘 모르겠어요. 일단 팀장님은 좀 무서우신 분 같고, 나머지 분들은 얘기도 안 해봐서." 

"우리 팀이 다른 팀보다 분위기는 좋지. 일할 때 빡세게 하고, 으쌰으쌰해서 단합력이 좋다 해야 되나? 뭐 여하튼 그렇네. 사람들이 다 너무 좋고 그렇지. 일하다 보면 알 거야." 

"일하시면서 어떤 게 좀 많이 힘든가요?" 


 '일하면서 힘든 점…' 구구절절 사연도 많고 그간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갓 들어온 신입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악영향만 줄 것 같아서 뻔하디 뻔한 대답들만 늘어놨다. 고객과의 충돌이라든지, 잦은 야근이라든지.

 사실 이 무렵, 나는 다시 퇴사 욕구가 끓어올랐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직무, 부족한 중국어 실력, 강도 높은 업무 등 입사 초기부터 줄곧 생각해온 이유들로. 하지만 부사수 L의 입사로 인해 잠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입이 들어오고 나서 바로 퇴사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그동안 나를 믿고 격려해준 많은 이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줄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퇴사 생각을 아예 접은 것은 아니었고, 정말 잠시만 접어둔 것일 뿐이었다. 사수이자 선배로서 신입사원 L의 회사 적응을 돕는 것이 우선이었고, L이 빨리 적응해야 내 퇴사 시기도 더 빨라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신입사원이자 부사수 L과의 첫 식사자리는 맥주 500cc 한잔씩 가볍게 마신 뒤 끝이 났다. L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좋은 선후배 사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은 강하게 받았었으니까. 좋든 싫든 그날부터 나는 L의 사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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