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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22. 2020

누구나 겪는 신입사원 이야기.

(17) 나 때도 그랬어, 괜찮아.

- 사수가 된다는 부담감.

 지난 글에 이어서 사수가 된 나의 이야기, 그리고 부사수 L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자 한다. 사실, 신입사원이 새로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돌 무렵, 많은 이들이 나를 부러워했었다. 팀원 한 명이 늘게 되면, 그 팀의 구성원들이 맡고 있는 업무의 총량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게다가 바로 밑에 한 명을 받게 된다면, 단기적으로는 20~30% 장기적으로는 50% 이상이나 본인이 담당하던 업무를 그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 이점 때문인지 모두들 나를 부러워했지만, 내게 부사수가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업무량이 줄어드는 걸 떠나 부담감과 책임감이 커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오올~ H, 이제 신입 받는다데? 좋긌네?"

"아, 아닙니다. 좀 떨리기도 하고, 부담되기도 하고."

"왜? 와서 일 좀 가르치면 편해질 낀데."


 일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가장 크게 걱정했던 부분은 업무 능력에 대한 비교. 당시 나는 업무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이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작은 품질 이슈에도 고객사와 (언어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했던 나였고, 그때마다 업무는 이미 O선배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능력 있는 신입사원이 들어와서 나를 대신하여 이슈를 뚝딱 해치운다면,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좌절감에 빠질 것 같았다. 그랬기에 신입사원을 받기 이전부터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나보다 일을 훨씬 잘하면 어떡하지?'라든가, '나보다 중국어를 잘해서 내 자리를 뺏어가진 않을까?'라는 식의 걱정을 일찌감치 하기 시작했었다. 훗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었고.

 둘째로는, 무지(無知)에 대한 부분. 앞서 말한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모르는 부분은 더욱 그러했다. '신입사원이 뭔가를 물어보았을 때, 나도 그걸 모르면 어떡하지?', '내가 그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라는 걱정을 늘 안고 있었다.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O선배 때문이었다. O선배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말이다. 고객사 주요 미팅이나 임원진이 자리한 회의 자리에서도 O선배는 늘 대담하고 자신감 있게 말하곤 했었고, 그런 모습을 봐왔던 내 눈에 그는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척척박사 같이 보였다. 물론 그도 모르는 게 많았겠지만, 사원 수준에서는 거의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었고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팀장님도 'O는 난 놈이야'라고 얘기했을까. 신입사원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봐왔던지라, 내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사수라면, 선배라면, 이런 것쯤은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누가 물어봐도 거뜬히 설명해줘야 해.'라는 생각이 박혀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품이 어떻게 조립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어떤 이슈가 발생했을 때 어느 부서의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으니까. 부끄럽게도 그때 나는 입사 1년 3개월을 막 채웠을 무렵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책임감에 대한 부분이었다. 내가 막내였을 땐 그저 나 하나만 잘하면 그만이었고 혹여나 내가 실수하더라도 내 위의 상사들이 나를 대신하여 그 문제를 책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수가 되고 나서는 얘기가 달라졌다. 회사 조직은 군대 조직과 매우 유사하기에 군대를 빗대어 얘기하자면, 신병의 실수는 곧 맞선임의 부족한 교육 때문. 그때마다 불려 가는 것은 맞선임이고, 욕먹는 것 역시 맞선임이었다. 결과적으로 신입사원의 실수는 사수의 책임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신입이었을 때 O선배도 똑같이 그런 과정을 겪어왔겠지만, 난 이 모든 것들이 부담이었고 걱정이었다.

 



- 나 때도 그랬어.

 앞선 걱정들과 부담감이야 어찌했든, 신입사원으로 L이 입사한 마당에 이런 고민과 걱정들은 무의미했다. 나는 이제 그를 빠른 시간 안에 교육하고 성장시켜야 했다. 그게 내 임무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기는 쉽다. 다만,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밑그림을 먼저 그릴 것인지 아니면 무턱대고 물감칠부터 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신입사원 L은 그런 백지 앞에 앉은 화가 지망생이었고, 나는 그 옆에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지도하는 선생이었다.

 그를 교육하기에 앞서, 불과 1년 3개월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야 했다. 신입사원 시절을 돌이켜본다면, 매일이 막막하고 답답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하고 싶다는 의욕은 넘치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늘 막막하고 답답했던 것. 게다가 우리 회사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처럼 규모가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얕게라도 배경지식을 얻을 기회조차 없었다. 때문에 신입사원은 들어오자마자 총 잡는 법부터 배워서 하루라도 빨리 전장에 투입되어야 하는 학도병 같은 존재. 또, 선배들이 알려준다한들 그걸 이해하고 업무에 적용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터였다. 이렇게 여러 어려움이 있는 신입사원이지만, 실무에서는 그런 모든 것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여긴 전쟁터니까.

 다행스럽게도 신입사원으로서의 고충과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었던 나는, 경험과 기억의 파편들을 꺼내어 L에게 백지 위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방법들을 차근차근 알려주기로 했다. 내가 막 입사했을 때 어떤 것들이 궁금했고 적응하는 데에는 어떤 것들이 힘들었는지를 복기하며 그에게 하나하나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L, 오늘 교육해야 되니까 회의실 좀 잡아놔줄래? 회의실 예약하는 거 배웠지?"

"아, 네네. J선배가 알려줬습니다. 어디로 잡을까요?"

"아무 데나 잡아놔라. 아니다, 그냥 1층 백두산으로 하자."


 바쁜 업무시간 중에도 짬을 내어, 미리 잡아놓은 회의실에 L과 함께 들어가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웨이퍼가 뭔지 들어봤지?"

"어… 아뇨. 여기 와서 처음 들어봤는데요."

"오케이, 그러면 그냥 아예 처음부터 설명해주께. 스마트폰 있지? 화면 나오게끔 하는 부품이 안에 있을 거잖아. 그거를 우리가 만드는 거야. 아까 샘플 가져온 거 줘봐. 이걸 테이프 또는 필름이라고 하고, 이 위에 칩을 올려서 조립을 하는 거야. 오케이?"

"그냥 듣기에는 간단해 보이는데…"

"이게 반도체 중에서 제일 간단한 거야. 우리는 그냥 조립만 하는 거고, 조립에 필요한 재료는 다 사 오지. 아, 사업구조며, 생산구조며 이런 거까지 다 알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고, 오늘은 간단하게 이론만 이해하면 돼."


 신입사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내용임에도 L은 열심히 받아 적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곧잘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것. 반복되는 설명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았고 그럴 때면 나 역시도 답답하고 지쳐갈 따름이었다. 알려주고 싶은 것들은 한 가득이었지만, 신입에게 너무 큰 기대와 바람은 되려 독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교육은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진행했었다. 물론 내가 없거나 바쁠 땐, O선배나 J책임님이 대신 교육하기도 했었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또 하자. 매점 고고."

"아, 네네."

"오늘 뭐 배웠는지 대충 알겠지?"

"어… 사실 잘 모르겠어요."

"엥? 야, 한 시간을 그렇게 핏대 세우면서 알려줬는데?" 

"음, 아직은… 많이 봐야 알 것 같아요." 

"아, 그래 그래. 나 때도 그랬어, 괜찮아. 꼰대처럼 나 때는 말이야 안 할라 했는데, 크크크. 처음엔 다 어렵지, 어려워." 


 직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신입사원 시절에는 정말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나도 그랬고, 팀장님이나 책임님으로부터 십수 년 전 그들의 신입 에피소드를 들어봤을 때도 그러했다. 그 경험들을 통해 얻어가고 배워가는 것이 있고,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할 순 있겠지만. 

 부사수 L을 교육하면서 느꼈던 다행스러움은,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이나 부담감이 아-주 조금씩 해소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업무에 대한 비교는 꽤 많은 시일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왜냐면, 그는 이제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고 나는 아무리 그래도 1년 3개월을 실무에 있지 않았는가. 그런 걸 걱정하기보다는 그가 빨리 업무를 배우고 나와 함께 일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또한, 그를 교육하면서 참 많이 했던 생각은 '예전에는 이런 것도 진짜 몰랐었는데, 이제는 남에게 설명해줄 정도가 되었구나'라는 것. 물론 그가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 물어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걸 알고는 안도감을 느꼈던 탓도 있었고. 어쨌든 그는 그저 어미새 따라다니는 아기새 마냥 나만 졸졸 따라다니며 일하는 걸 배워야 했다. 나도 O선배에게 교육받을 때 그러했고. 




- 신입사원의 실수.

 이렇게 한동안은 이론 교육을 이어나갔고, 동시에 실무도 서서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L은 그래도 일머리는 비교적 좋았는지, 금세 배우고 잘 따라 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L이 대형 실수를 저질렀다.


"L, 현장 가서 제품 좀 보고 온나. 라벨 사진 찍고, 실물 좀 가져와." 

"네, 책임님." 


 L이 입사하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우리가 생산한 제품 중 하나에 라벨 문제가 생겨 우리 쪽으로 다시 반품이 되었고, 책임님은 실제 이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L에게 실물을 가져오라는 업무를 지시했다. L은 호기롭게 현장으로 향했고, 오래지 않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임님, 가져왔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L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한 손에는 아무런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채로, 외부에 완전히 노출된 제품이 들려 있었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반도체 제품이 외부의 먼지나 이물질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도체 제품은 미세한 회로들로 설계되어 있는데, 이 회로들 사이에 각종 먼지며 이물질이 끼어들어가면 불량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가 주로 다뤄왔던 품질 이슈의 80%가 이런 이슈들이었다.) 잠깐의 외부 노출에도 이물질들이 제품에 유입될 수 있기에, 제조 현장은 클린룸이라는 이름으로 외부로부터 철저히 관리되어 이물질과 먼지로부터 제품을 보호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품을 현장으로부터 반출할 때에도 반드시 포장을 한 채로 반출해야 하는 것이 필수. 이런 유의사항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L은 실물을 가져오라는 말에 제품 그대로를 가져온 것이었다. 


"야! 이거 그냥 들고 오면 어떻게 해!" 

"네?" 

"아니, 이거 포장해서 들고 나왔어야지. 빨리 들고 들어가!" 

 

 L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우선은 제품을 최대한 빨리 다시 클린룸에 넣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놀라고는 얼른 L을 다시 돌려보냈다. 그때 나는 다른 일들로 너무 바빠서 그를 따라갈 겨를이 없었고, 나를 대신하여 O선배가 L과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몇 분 뒤, L은 대역죄인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선배, 죄송해요." 

"괜찮아, 처음이니까 모를 수도 있지." 

"책임님이 실물 들고 나오라길래, 그냥 그대로 들고 오라는 줄 알았어요." 

"나나 책임님이나 제품 어떻게 들고 오라는지 제대로 설명을 안 했으니까, 다 잘못이지. 다들 놀라긴 했는데, 뭐. 빨리 갖다 놨으니까 다행. 괜찮아. 아, 대신 다음에 뭔가 잘 모르는 게 있거나 확신이 안 서면, 바로바로 물어봐." 


 L도 많이 놀랐는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생각해보면, L이 잘못한 건 없었다. 반도체 제품을 직접 보고 만져본 경험이 없는 신입사원에게 어떠한 유의사항도 알려주지 않고 단순히 지시만 했으니, 오히려 사수인 내 잘못이 더 컸던 셈이다. 다만, 마지막 말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나 판단이 안되면 바로 물어보라고 당부를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런 실수를 참 많이 했었다.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대로 판단하고는 일을 그르쳤던 경험들. 그때 그 순간 내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O선배나 J책임님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 그런 경험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신입사원 때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들. 


"괜찮아, 나도 뭐 그런 실수 많이 했었으니까. 나 때도 그랬어, 괜찮아."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L은 그 뒤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로서도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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