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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28. 2020

쉽지 않은 홀로서기.

(19) 저, 잘할 수 있을까요?

- 저, 잘할 수 있을까요?

 O선배의 퇴사 통보에도 팀장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마치 그의 퇴사와 이직을 예상한 것처럼 반포기 상태였달까. 반면, J책임님은 마지막까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잡고 싶었는지 O선배를 설득하려 했다. 

 

 "야, O. 니 전 사수 L대리도 중국 가서 지금 개고생한디. 알제? 거기다가 지금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도 유행한다이가. 연휴 동안 잘- 생각해보고,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 오케이?" 


 나 역시 지난 2번의 퇴사 선언 때 J책임님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때의 나와 비교하면 O선배는 그 결정이 너무나도 확고한 상황. 이미 갈 곳이 정해져 있었고, 게다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책임님의 만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연휴가 지나고 나서도 O선배의 생각은 당연히 바뀌지 않았고, 이어 공식적으로 그의 이직 소식이 팀장님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뭐,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우리 O가 이번 달까지만 하고 다른 회사로 간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박수."


 사실 이 소식을 누구보다도 먼저 듣고 예방주사까지 다 맞은 나였음에도, 그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순간엔 또 한 번 많은 감정이 오갔다. 걱정, 두려움, 초조함, 의문스러움… 수없이 되뇌어 봐도 매번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 말이다. 물론 나 역시 J책임님처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의 퇴사를 말리고 싶었다. 심지어는 당시 중국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의 이직을 막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내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선배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직이 절대적으로 맞는 방향이고 결정이었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곳에서도 열심히 살라는 응원과 격려뿐이었다. 그리고 내 앞날이 부디 잘 풀리기만을 바라는 것뿐.


"행님, 이제 진짜 결정된 거네요?"

"어. 갈 준비 해야지, 이제." 

"기분 어때요? 진짜 간다고 생각하니까?"

"뭐, 시원섭섭하지. 그래도 다행인 건, 걱정만큼 팀장님이나 책임님이나 안 잡았다는 거? 내 처음 나간다 했을 땐, 진짜 말도 아니었디."

"하… 이제 한 달도 안 남은 거 같은데… 행님 없이도, 저 잘할 수 있을까요?" 


 사수 선배의 빈자리가 너무도 걱정이었다. 앞서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입사 이래로 줄곧 능력 있는 사수 선배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왔던 나였다. 이제 곧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땡볕에 혼자 던져질 나 자신이 너무 두려웠다. 그가 했던 많은 업무들을 인수인계받을 것도 걱정이었고, 앞으로 혼자 이겨내야 할 그 무게가 내게는 더욱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할 수 있을 거야."

"3개월만 딱 버텨보고, 아니면 저도 나가려구요."


 평소 그가 소화해온 업무량만 봐서는 인수인계를 받는 데만도 수개월이 소요될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이직 소식을 알린 것이 1월 중순이었고 회사를 떠나기로 한 날짜는 2월 중순이었으니, 고작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던 것. 안 그래도 원래 많았던 업무에다가 인수인계 업무까지 쌓이니 스트레스는 날로 커져갔고, 이런 이유로 매일 아침 출근길에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했다. '아, O선배 안 가면 좋겠다, 제발…' 



- O선배와의 이별, 그리고 홀로서기 첫날.

 허나 야속하게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O선배가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그날도 어김없이 대형 품질 이슈 때문에 고객사와 입씨름을 벌였고, 점심식사 후에 있을 고객사 담당자와의 컨퍼런스콜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 위치한 작은 회의공간에서 전화기 연결을 하고 있던 중에 O선배가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H, 내 이제 간디." 

"아, 가시는 거예요? 저도 잠깐 나갈게요." 


 회의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O선배의 마지막 퇴근길을 함께 했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P형님도 함께 회사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갔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합이 잘 맞고 친분이 두터웠던 삼 형제였는데, 그중 한 명이 떠난다고 하니 말하지 않아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서로가 느낄 수 있었다.

 

"P행님, H, 내 가께. 뭔 일 있으면 전화하고."

"그래, O. 잘 들어가고."

"행님, 조심히 가세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내 직장생활의 기둥과도 같았던 그는 그렇게 떠났고, 이제 진정한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옥의 문이 열렸다. 


 O선배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다시 돌아온 사무실. 사수 선배를 떠나보낸 후의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을 시간도 없이, 바로 컨퍼런스콜을 준비해야 했다. 이번에 발생한 품질 이슈는 꽤나 큰 이슈였던 데다가, 내가 처음으로 필드 업무를 담당하게 된 이슈라 더 큰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회의에는 파트리더인 J책임님과 부사수 L도 함께 참석했다. L은 이제 막 실무를 시작한 병아리 사원이었는데, 그래도 중국어 실력은 꽤 괜찮아서 내 서브로 통역을 도와줄 예정이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컨퍼런스콜. 하지만 그 호기로움은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고, 할 수 있는 중국어도 이내 밑천을 드러냈다. 회의 내내 버벅거리는 말과 함께 '不好意思,不太明白。(죄송한데, 이해를 잘 못했어요)'를 반복했다. O선배 없는 첫날부터 이렇게 고생할 줄이야. 고객사 담당자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J책임님을 찾고는, 느릿느릿하지만 짧은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머리가 하얘졌고,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지.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야, H, 정신 차려. 안 되겠으면 L이 옆에서 좀 도와주고."


 안 그래도 큰 이슈였는데 고객사의 닦달에 의사소통까지 안 통하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너무 버거워하는 나를 대신하여 L이 담당자와의 대화를 이어나갔고, 담당자도 나보다는 L과의 대화가 더 잘 통했다고 느꼈는지 회의 내내 L의 이름만 계속 찾기 시작했다. 사실 통역이야 누가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왔던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1년 넘게 차이 나는 부사수에게 밀렸다고 생각하니, 정말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 순간 이 세상 나락 끝에 버려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존재의 가치가 철저하게 파괴당한 느낌. 

 게다가 이 상황을 사무실에 있던 모든 이가 보고 듣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사무실이 아닌 회의실에서 따로 진행을 했겠지만, 하필 이날 모든 회의실이 다른 회의들로 차 있었다. 이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사무실 한편에 있는 회의공간에서 컨퍼런스콜을 할 수밖에 없던 것. 회의의 맥이 뚝뚝 끊기고 책임님이 영어를 L이 중국어를 하고 있는 광경을 동료 사원들 뿐만 아니라 팀장님이며 실장님까지 모두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그게 현실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O선배를 대체할 수 있는 인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회의가 바쁘고 정신없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나는 쉬이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회의감과 좌절감의 늪에서 허우적 대고만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이, 지옥 같던 컨퍼런스콜도 3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 겨우 끝이 났다. 논의한 내용이 많기도 했고 각자가 알아들은 내용이 달랐기에, 회의가 끝나자마자 우리 모두는 고객사 요청사항을 취합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의록 쓰는 데만도 거의 1시간을 넘게 썼고,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책임님, 식사하러 가시죠." 

"어어, 커피 한 잔 하고 가자." 


 진 빠지기는 책임님도 마찬가지셨나 보다. 다른 팀원들은 먼저 1층 구내식당으로 내려갔고, 나와 J책임님 그리고 L은 커피를 챙겨서 흡연장으로 향했다. 


"H, 힘들제?" 

"어우, 죽겠는데요. 어질어질해요." 

"이제 시작이다. O 없으니까 니도 업무 제대로 익히는 데 시간 필요할 꺼고. L도 같이 배워야 되니까. L, 니도 옆에서 H 도와줘야한디." 

"네, 알겠습니다." 

"잘하고 있다이. 절대 고객사 말에 말리지 말고. 무조건 장기전이라 생각하고 질질 끌어야 된디. 길게 끌면 얘네도 제 풀에 지친다고." 

"네네, 알겠습니다." 


 멘탈이 완전히 박살난 나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잡아주려는 J책임님의 노력이 눈에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J책임님이야말로 O선배의 퇴사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손발을 맞추며 숱하게 많은 이슈들을 접하고 처리했던 그들이었을 테니, O선배의 부재는 팔 한쪽을 잘라낸 것과도 같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책임님은 언제나처럼 의연하고 침착했다. 




 저녁식사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대충 먹었다.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밥은 먹고 일해야 한다는 J책임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끼니를 때웠다. 다시 사무실로 올라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좋으나 싫으나 내 손에 쥐어진 일들은 내 손으로 해결해내야 했으니까. 그렇게 일을 시작하려는데, 실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H, 잠깐 자리로 와볼래?" 

 

 실장님과는 평소에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직급상으로도 팀장님보다 위였고 임원급을 제외하고는 최고 관리자 입장이기에 실무에 관해 터치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업무에 대한 터치는 딱 팀장님까지가 끝이었다. 물론 딱딱한 사무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도 하시고 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셨던 실장님이었지만, 이렇게 일대일로 얘기해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예! 실장님."

"서있지 말고, 앉아, 앉아. 오늘 회의하는 거 어땠어." 

"아… 본격적으로 혼자 해보니까 쉽지 않더라구요. 그냥 통화하는 거랑 분위기도 달라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치? O 있을 때는 옆에서 도와주는 입장이었다가, 이제는 업무 최전선에 서서 하는 입장이니까. 아예 다를 거라고. 근데 이런 경험들을 다- 성장할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고 열심히 한번 해봐. 오늘도 우여곡절 많았는데, 결과적으론 다 잘 끝났잖아? 맞지?"

"네네. 회의가 안 끝날 줄 알았는데, 어느덧 다 끝나 있었네요." 

"그래. 처음엔 쉽지 않지만, 나는 H가 다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 화이팅."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세상에 이런 직장이 어디 있고, 이런 상사들이 어디 있을까. 이제는 사수가 된 J책임님과 최고 관리자 L실장님, 그리고 이날 이야기엔 나오지 않았지만 팀장님, 모두가 내 고충을 모두 이해하고 위로하며 격려해주고 있었다. 

 O선배의 퇴사와 함께 본격적인 홀로서기가 시작된 첫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고 고객 CS 업무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지만, J책임님과 실장님의 위로와 격려로 겨우 버틸 수 있었던 하루였다. 물론, 내 감정은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이런 날이 계속될 텐데, 과연 나는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O선배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나 스스로 정한 3개월이라는 기간을 버틸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내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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