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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Oct 06. 2020

아, 퇴사하고 싶다!

(20) 퇴사하고 싶은 날.

- 퇴사하고 싶은 날.

 O선배의 퇴사 이후 다이내믹한 일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루하루가 아주 크고 높은 벽처럼 느껴졌고, 그 벽을 어떻게든 넘고자 발악을 했던 나였다. 어떤 날은 잘 이겨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잘 해내지 못했고 그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와 중압감은 나를 서서히 절벽 끝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내가 이 벽을 넘을 수 있다는 확신도, 그럴만한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책임님, N사 담당자가 오전에 CC(컨퍼런스콜)하자는데요."

"어, 몇 시에 하자든데?"

"10시에 하자네요."

"10시? 일단 준비해놔라."

"넵."


 그날도 아침부터 고객사와의 컨퍼런스콜이 예정되어있었다. 잔뜩 밀린 업무는 제쳐두고, 당장 눈앞의 이슈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늘 이런 식이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회의라 이슈 내용은 잘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준비해놓으라는 J책임님의 말에 부사수 L과 함께 전화기를 연결했다. 곧 회의 시간이 임박했고, 나는 평소처럼 고객사와의 전화회의를 시작했다.

 

"喂?(여보세요?)"

"喂,H, 你好。 听得见吗?(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소리 들리세요?)"

"是的,L, 早上好。我们可以开始会议吗?(네네, 저희 회의 시작해도 될까요?)"

”开始吧。(네, 시작하세요.)"


 옆자리에 J책임님과 부사수 L이 앉아있는 채로, 고객사와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다. 이번 이슈는 꽤나 큰 이슈였다. 고객사의 요구는 우리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큰 요구였으며, 이런 이유로 고객사는 '무조건 하라'는 입장이었고 우리는 '이건 절대로 못한다'는 입장으로 팽팽히 맞섰다. 그러던 중, 역시 의사소통의 문제로 회의가 꽉 막히는 상황이 찾아왔다.


"어… 책임님, 얘네가 무슨 말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L, 니는 알아듣겠나?"

"대충은 알아듣겠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이슈가 어떻든 간에 고객사와는 말로 풀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치명타인 셈이었다. 다시 또 시작된 J책임님의 영어 타임. 이럴 때마다 난 정말 죽고 싶을 정도의 자괴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통역하라고 이 자리 앉혀놨는데, 중화권 담당자가 중국어 통역을 못한다?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 알 수 없을, 말과 글로 표현하기에 부족한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영어로도 대화는 풀리지 않고 평행선만 달리게 되자, J책임님은 결국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C선임. 혹시 지금 시간 좀 돼요? 아, 딴 게 아이고 지금 우리 N사랑 CC 하는데, 야네가 무슨 말 하는지를 몰라서. 어어. 지금 2층 품질 사무실. 쫌 부탁하께요."


 마케팅팀의 C선임에게 SOS를 요청한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상부상조하는 것이 회사 조직이라지만, 이상하게도 마케팅팀에는 그간 도움을 주고받고 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마케팅팀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과 예전에는 O선배가 모든 껄끄러운 일들도 알아서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타 부서에 도움의 손길까지 바라야 하는 상황.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난처함과 죄송함, 그리고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한 감정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퇴사뿐이라고 생각했고.

 '아, 퇴사하고 싶다!'


 C선임의 통역 덕분인지 이후의 회의는 비교적 잘 흘러갔다. 나는 그 옆에 앉아 고개만 푹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투명인간, 쓸모가 없어져 구겨진 채로 버려진 종잇장과도 같았다. 분명히 담당자는 나였는데 어느덧 C선임이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으며, 모든 질문과 답변은 그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사실 그전부터 자존심이라고는 이미 바닥에 내팽개쳤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심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린 회의였다. 며칠 전 부사수 L이 나를 대신하여 고객사와의 회의를 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가,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 L과의 퇴근길.

 컨퍼런스콜이 끝난 후, 불편하고 거북한 마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 차리고 업무에 열중이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느낄 수 있었던 하루. 이런 하루도 저물어가기는 여느 보통날과 마찬가지였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사무실 자리는 하나하나 비워져 가고 있었다.


"선배님, 퇴근 안 하세요?"

"어, 해야지. 갈래?"

"예, 가시죠. 오늘 차 타고 가세요?"

"아니, 걸어갈라고. 니 먼저 가라."

"어, 저도 걸어갈게요. 같이 가시죠."


 평소 퇴근할 때는 늘 택시를 타거나, 동료들 차를 얻어 타고 했었다. 간혹 운동 겸 산책 겸 걸어서 퇴근할 때도 있었지만, 부사수 L과 함께였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L의 제안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퇴근 정리를 마치고 나와 L은 회사 정문을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 닮은 부분이 많았다. 지방대 인문학 전공 출신에, 중국어 공부를 비교적 오래 했었고 교환학생 생활도 했으며, 나이도 20대 후반으로 한 살 차이밖에 나질 않았으니. 그러나 일에 대한 관점이나 가치관에 있어서는 얼마나 달랐는지, 이날 처음 알게 되었다.


"요즘 일하는 거 힘들지?"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아직 잘 모르기도 하고, 안 해본 게 너무 많아서…"

"그치. 나도 똑같애. O선배 나가고 나서는 뭐랄까, 벽에 가로막힌 느낌? 예전엔 O선배가 방향도 잘 잡아줬는데, 이젠 잡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J책임님 계셔도 사실 국내파트까지 신경 쓸라면. 하나하나 케어가 안되지."

 "맞아요. 저도 O선배 나가고 나서는 뭔가 막막한 게 더 있는 것 같네요. 선배도 있긴 하지만, 선배 바쁠 때는 O선배한테 많이 물어봤었거든요. 근데 이제 책임님한테 바로 물어보기도 그렇고, 이것도 모르냐고 할 것 같고."

"맞지, 맞지. 똑같네, 뭐."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대화도 무르익었고, 나는 그동안 쉽게 얘기하지 못했던 내 생각과 감정들을 L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 그래도 이 일은 오래 못할 것 같다."

"어, 왜요? 설마… 나가시는 거 아니죠?"

"적성에도 안 맞는 것 같고, 중국어도 한참 딸리는 것 같고… 이런 얘기해서 미안하긴 한데, 나도 머지않아 나갈 것 같다. 요즘은 너무 힘드니까 퇴사하면 좋겠다는 생각 맨날 하지. 오늘만 해도 그랬고."

"아, 안돼요. 선배까지 나가시면, 저도 멘탈 나갈 것 같은데."

"하는 거 보니까 잘 하더만. 일하는 건 적성에 좀 맞아?"

"음, 적성에 맞다기보다는… 아직은 그냥 재밌는 거 같아요. 뭔가 전공으로 해왔던 걸 써먹으니까, 중국어 잘 배웠다 싶기도 하고. 그냥 전공 살려서 일하고 있는 거 자체가 감사하고 재밌네요. 선배는요?"

"아, 나는 완전 아니지. 내 전공이 중국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역사 전공 살릴 것도 아니긴 하지만. 난 맨날 중국어 괜히 배웠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하는 일이 돈도 많이 주고, 복리후생도 좋고, 다 좋은데. 워라밸 안 좋지, 그렇다고 나랑 맞는 일도 아니니까. 맨날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

"아… 그쵸. 그래도 저는 젊을 때 열심히 일해서 벌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인데. 여건만 된다면,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표현에 있어서는 투박한 두 남자의 대화였지만, 이 진중한 대화 속에서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스트레스에 찌들어 살고 있던 내게, 돈이란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없이 자라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돈 조금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적어도 돈과 행복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행복을 선택을 했을 것이다. 반면, L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주의. 그의 생각과 가치관도 분명 일리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라는 바일 것. 그랬기에 서로는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1시간 정도 걸리는 퇴근길은 L과의 대화 덕에 금세 끝이 났다. 많은 대화를 했고,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던 좋은 시간. 동시에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퇴사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선배, 퇴사하면 안 돼요."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 내일 되면 또 괜찮을 수도? 조심히 들어가."

"네네, 내일 뵐게요."


 L에게는 미안하지만, 퇴사에 조금 더 가까워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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