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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Oct 08. 2020

세 번째 퇴사 선언 : 그렇게 나는 무너졌다.

(21) 회식 자리에서의 퇴사 선언.

 인생을 살아가면서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생기길 마련이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이번에 써 내려갈 기억은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1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팀장님은 댁에서 회식하는 걸 좋아하셨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TV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3차는 우리 집에서 한 잔 하고 가게나'를 외치곤 하셨고, 팀장님 댁에 도착했을 땐 마법처럼 각종 술과 안주들이 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아예 작정을 하고 그곳에서 회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할 예정이었다.


"이번 회식은 우리 집에서 간단하게 한 잔 하자고. 안 되는 사람?"

"없습니다."


 원래 회식을 죽도록 싫어했던 나였지만, 그간 너무 바빠서 회식은커녕 팀원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리프레쉬라 생각하고 회식에 참석했다. 물론, 내 의지와는 무관한 반강제 참석이긴 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 이야기에서 식상하게 나오는 표현처럼, 화장실 들를 시간도 없이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가뜩이나 제일 깐깐하고, 나와 가장 트러블이 많았던 F사 담당자 S와의 컨택이었기 때문에, 퇴근 전까지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였다.


"H, 안 가나?"

"아, 예. 지금 S한테 자료 하나만 보내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

"한 10분 걸릴 것 같습니다."

"제일 늦는 사람 글라쓰로 한잔 마시는 거 알제. 빨리 와래이."


 J책임님의 독촉에도 막바지 업무는 쉬이 끝이 보이질 않았고, 회식 집합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2년 간의 경험 상, 이런 업무는 계속 앉아 있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념하고 그냥 과감히 노트북 전원을 꺼버렸다. '내일 아침에 보낸다고 하지, 뭐.'

 J책임님의 차는 이미 떠났고, 별수 없이 국내파트 S선배의 차를 타고 후발대로 출발했다. 마침 음료와 간식을 사고 오라는 팀장님의 심부름에, 글라스 벌주는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늦게나마 도착한 팀장님 댁에는 먼저 도착한 팀원들과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술과 안주들이 역시나 기다리고 있었다.


"세팅하고, 각자 자리 잡고 앉아라."


 팀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머지 팀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으니, 넓게만 보였던 거실도 꽉 차게 되었다. 오늘의 메인 안주는 김밥과 삼겹살. 술자리에 웬 김밥이냐 할 수 있는데, 사모님의 김밥이 그-렇게 꿀맛인지라 팀원들 모두가 너무 좋아라 했다. 이런 이유로 사모님이 특별히 준비해주신 술안주였다. 주린 배를 김밥으로 살짝 달래주고, 이어 불판 위에 선홍빛 자태를 뽐내는 생고기를 한 줄 두 줄 올려 굽기 시작했다.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팀원들의 대화 소리로 회식 자리는 시끌벅적해졌다. 그때쯤, 내 휴대폰에는 라인 (Line) 전화벨과 메시지 알림이 계속해서 울렸다. '아, 이 XX. 내일 보낸다니까.'

 



 그래도 몇 번이나 울리는 벨소리를 못 본 체 지나치기엔 그 횟수가 너무 많았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현관 앞에 있는 창고방엘 들어갔다.

 

"喂?(여보세요?)"

"Hey,H。为什么这么不接电话?(이봐요, H.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말에도 칼이 있다고, 휴대폰 너머 그의 목소리는 이미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 역시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분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급한 용건이 있거나 품질 이슈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을 듣고는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下班了吗?你还没发给我那个资料吧?怎么下班?(퇴근했어요? 아니, 그 자료 안 보내줬잖아요, 아직? 근데, 어떻게 퇴근할 수가 있죠?)"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서도, 마치 자기가 왕인 것 마냥 말하는 그의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동시에 단전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갑-을 관계라 하더라도,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맘에 안 들었다. 게다가 그도 지금 퇴근하고 회식 중인 것 같았다. 그쪽에서도 회식 특유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었다. 완전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마인드였다. 그럼에도 한번 더 화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 난 을이니까.


"不好意思,我今天有事儿,下班了。但是,已经做好了,所以我明天上午应该回复给你。(미안해요, 오늘 제가 일이 있어서 퇴근했네요. 다 해놨고, 내일 오전에 회신해줄게요.)"

"你们已经投入好了那个原料?(원자재 다 투입했어요?)"

”是的,我们已经做好了,所以我要整理作业结果。(네, 투입 다 하고, 결과 정리하려고 했죠.)"

"真的做完了吗?你平时做得很慢,但是,这次这么快做好啦?(진짜 다 한 거 맞아요? 당신 평소에는 그렇게 늦게 했으면서, 이번에는 이렇게 빨리 투입했다구요?)"

 

 할 말을 잃었다. 오후에 그의 업무 요청을 받자마자 원자재를 다 투입해서 필요한 결과까지 받아 놓은 상황. 자료만 정리해서 송부하면 되는데, 그는 내 평소 업무 태도를 지적하고 업무 실행 여부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평소 업무처리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손쳐도, 과거의 일까지 들추면서까지 이렇게 얘기하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중요도만 놓고 본다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업무였다.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일도, 생산 일정에 큰 타격을 주는 대형 이슈도 아니었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에 퇴근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고. 내 생각엔 분명 S가 내게 트집을 잡으려는 일종의 심리전이랄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나도 한 마디 했다.


"Hey,S。我们已经下午打电话了吧?我按照你的要求及时做那个要求。并且,那个事儿不那么紧急吧,是吧?但是,我觉得你这么说的态度太过分了。(이봐요, S. 우리가 오후에 이미 전화 다 했죠? 저는 당신 요구에 따라 바로 그 요구사항을 다 들어줬어요. 그리고, 이 일 그렇게 급한 거 아니잖아요, 맞죠? 근데 이렇게 얘기하는 건, 제 생각엔 정도가 많이 지나친 것 같네요.)"


 평소 고객사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업무 방식은, 늘 고개를 조아리며 '예, 예'하는 고분고분한 협력사 직원.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다 내뱉고 나니,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며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이 시원함은 찰나일 뿐이었다. 그가 화를 벌컥 내면서 감정적으로 맞받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啊?你这么说啦!现在你就回去办公室,然后到12点发给我资料!知道吗?!(뭐라고? 당신 이렇게 얘기했어? 지금 당장 사무실 돌아가서 오늘 12시 안에 자료 나한테 보내! 알겠어?!)"


 이때부터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 뒤로도 그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내게 많은 요구를 했지만, 그가 쏘아붙인 말들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고,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고 짜증 났다. 한참 그의 고성을 듣고 있던 나는, 결국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XX! 그만하라고!"



 

 단말마 같은 외침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순간 나는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일을 왜 하고 있어야 하나,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야속하고 서러웠다. 책장에 기대어 고통스러움에 한참을 서있다가 몇 분이 지난 후에야 회식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팀원들은 내 비명을 듣지 못했나 보다.


"와, 누군데? S가?"

"네…"

"잘 해결하고 왔나?"


 잘 해결하고 왔냐는 팀장님의 물음에, 왠지 모르게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차오르는 감정들을 눌러보고자, 김밥 두 개를 움큼 집어서 입 안으로 욱여넣었지만. 결국,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아… 아뇨…"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고방으로 향했다. 방 한편 구석 자리에서, 나는 주저앉아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는 수 십 분을 울었다. 엉엉 울었다. 스물아홉 평생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쌓여왔던 스트레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잘 해낼 수 없는 나의 역량과 그릇.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과 서러움. 그 모든 것들이 밀려왔다.

 바다 위 작은 물결이 파도가 되고, 그 파도가 점점 커져 집채 만한 해일되는 것처럼, 그간 나를 짓눌러왔던 모든 감정들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를 덮쳤고, 그대로 무너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고, 이제는 이겨내고 싶지도, 버티고 싶지도 않았다.

 

"H, 갑자기 와 그라노."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동료 J형님과 J책임님이 달려와서는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그들은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이미 이 상황에 대한 원인과 그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다 알고 있었다. 서러움 가득한 울음 속에서 겨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못 하겠어요… 진짜… 이제는 못 버티겠어요… 진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아침에 출근할 때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지고 싶고… 주말 끝나고 구미로 돌아오는 길에는 강에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죽으면 편해질까 생각을 해요… 열심히 하고… 버티는 데까지 버틴다고 그동안 해왔는데… 이제는 못 버티겠어요…"


 그랬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이미 갈 데까지 간 것이었다. 20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하면서 행복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매달 월급날마다 통장에 300씩 박히면서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일은 내게 스트레스만 주는 존재였다. 마음과 정신을 다 갉아먹어 가며 이렇게 돈을 버는 건 의미가 없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눈 떠 있는 순간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고,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족한 중국어 실력이 문제인 줄 알았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겠지만, 난 애초에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유리멘탈에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싫은 소리 다 들어가면서 갑질을 당해야 하는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O선배가 떠나고 나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모든 일을 맨몸으로 부딪쳐가며, 느리지만 혼자서 해결하려 노력했다. 바쁜 J책임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아직 업무를 잘 모르는 부사수 L을 대신해서. 그러나 이미 지쳐버린 나는, 그나마 버틸 힘도 다 써버린 것이었다. S와의 통화는 그동안 만들어온 폭탄을 터뜨릴 기폭제에 불과했고.

 토악질하듯 내뱉은 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나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속이 조금은 시원했다. 그리고 이어서 J책임님이 입을 뗐다.


"그렇게 힘들었나. 일단 진정하고. 알겠다. 내, 팀장님이랑 얘기해보께. 니가 그동안 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다. 자, 눈물 닦고."


 한참을 울고 눈물샘이 말라붙어서야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책임님과 J형님은 먼저 방을 빠져나갔고, 나는 홀로 감정을 추슬렀다. 정신을 차린 후 돌아온 회식 자리에선 다들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퉁퉁 부은 눈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이 때문에 나를 보는 그들의 반응을 보지 못했으니. 회식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술을 마셨는지, 그 맛있는 김밥과 삼겹살을 먹었는지, 그 어떤 것도.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날 회식 분위기는 초상집이었다는 것.      


 그날, 나는 그렇게 완전히 무너졌고,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세 번째 퇴사 선언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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