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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Oct 12. 2020

퇴사 면담과 정신과 치료.

(22) 마음의 병 치료기 1. 

- 퇴사 면담.

 폭풍이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찾아왔다. 사무실로 출근해서까지도 나는 격앙된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고 흥분과 불안 상태가 계속되었다. 업무 시간이 되자마자, 팀장님은 나와 J책임님을 불러 퇴사 면담을 가졌다. 전날 세 번째 퇴사 선언에 대한 면담. 장소는 2층 대회의실이었다. 그 넓은 회의실에 세 명만 앉아있으니, 너무나 고요했고 적막했다.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이번에는 과연 퇴사할 수 있을 것인가. 


"H… 어제 S랑 있었던 일은 J책임한테 다 들었다… 퇴사하겠다는 얘기도…" 

"예." 

"딴 건 지금 안 중요하고. 지금 니 마음, 니 생각이 어떤지 먼저 얘기해봐." 


 지금의 내 마음, 내 생각?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내 상태를 어찌 쉽게 얘기할 수 있을까. 어제 S와의 사건이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퇴사라는 결정은 결코 하루 이틀 만에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입사 이후 줄곧 생각해오고 꿈꿔왔던 퇴사였고, 이미 두 번이나 얘기했지 않았나. 그래서인지 내 상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뜸 들이고 쉽게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팀장님이 다시금 입을 여셨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돼." 

"솔직하게요?" 


 작정을 하고 그냥 다 말씀드렸다. 어젯밤 그렇게 펑펑 울며 토악질했던 것처럼. 


"어… 뭐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음… 그냥 저한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처음엔 그냥 중국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싶어서,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꼭 그것 때문에 힘든 건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그냥… 저한테 안 맞는 일인 것 같아요. 아무리 비싼 옷을 입어도 자기한테 안 맞으면 안 어울리고 불편하고 그런 거처럼요. 주변에서 보면 나름 탄탄한 회사에 신입치고는 많은 돈을 받는데, 저는 그냥 일이 안 맞으니까 모든 게 그냥, 다 너무 힘들었어요. 성격이 원래 내향적인데, 외향적인 일을 해야 하는 것도요. 고객사 오디트 와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고, 업무할 때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싶고, 사람 대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고… 아시겠지만, 벌써 퇴사한다고 두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스스로도 극복해보려고도 했고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려 했는데… 이제는 진짜… 더 이상 못하겠어요." 

 

 어떤 필터링도 없이 있는 감정 그대로를 이야기하다 보니 또다시 감정이 격해졌고, 숨이 가빠 오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울보는 아닌데, 이때의 나는 그냥 모든 게 힘들었나 보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울고 나면 그렇게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으니까. 그러나, 퇴사 면담 자리에서 엉엉 울 수는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일하면서 단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질까 생각하고… 자기 전에는, 다음날 눈을 안 뜨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요. 주말에 부산에서 구미 올 때는… 버스 사고 났으면 하고. 택시 타고 산호대교 넘어오면서는… 그냥 강에 뛰어내릴까 생각을 수십 번 하거든요… 지금 상태는 이래요."


 팀장님은 팔짱을 낀 채, 내 얘기를 한참 듣고 계셨다. 나는 그렇게 팀장님의 첫 질문에 긴 대답을 마치고는 아주 깊은 숨을 후우 하고 내쉬었다. 곧, 팀장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병원은 갔다 와 봤나? 이 정도면 많이 힘들었을 낀데…" 


 나 역시도 내 심리 상태가 정도를 넘었다 생각해서, 금요일에 반차를 쓰고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를 받으러 갈 생각이었다. 전날 이미 예약을 해놓은 상황이었고. 


"금요일에, 시내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예약했는데… 가기도 전에, 이렇게 일이 터졌네요." 

"일단 병원 한 번 갔다 와. 지금 이 상태로는 일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해. 병원도 구미에 있는 데 가지 말고. 주말에 부산 내려가제? 좋은 데 있는지 알아보고,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가. …… 사실 내가 아무한테도 얘기는 안 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잠시 뜸을 들이시고는 다시 이야길 이어나가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팀장님 고백에 나와 J책임님은 조금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팀장님 당신께 어떤 문제나 이상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적인 이유로 정신건강의학과에 몇 번 가셨었고, 이후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 쉬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기도 했고, 그렇게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했다.


"요즘은 정신과라고 안 하고, 정신건강의학과라고 한다고. 그냥 감기 걸리면 병원 가는 것처럼, 그냥 한 번 쓱 갔다 오면 돼. 바로 퇴근하고 부산 내려가. 잘 알아보고 거 가서 한 번 진료 보라고." 

"네네, 알겠습니다."




 병원이야 시간 내서 가면 되는 거였지만, 나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야길 하고 싶었다. 퇴사. 지금 당장 나는 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받는 심리치료나 약물치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고통의 끝은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오직 퇴사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것이 이 면담의 최종 목적이었기도 했다. 팀장님은 뒤이어 퇴사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내셨다.


"일은… H. 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안 맞는 거 같기는 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도 맞고. 근데, 솔직히 말하면, 딴 데도 다 똑같그등? 사람 대하는 거나 일하는 거나, 다. 그건 알제?" 

"네네."

"그리고, 뭐. 행님이나 J책임이나 주변 동료들은 다들 니 일 잘한다고 생각해. 니처럼 이래 꼼꼼하게 일하는 사람? 없어. 누가 그렇게 업무 하나하나 노트에 써가면서 체크하고 그러나? 없어, 없다고. 내 회사 생활 20년 정도 했는 데도 니만치 일하는 아들 못 봤어. 라벨이나 출하성적서, 전산 이런 것도 니 말고 아는 사람 없잖아. 맞제. 그래서 솔직히 회사 입장으로서나 팀 조직 입장에선 H가 안 나갔으면 한다. 니가 진짜 죽어도 CS는 못하겠다 싶으면, 다른 부서로 옮겨주는 거까지. 그것까진 한 번 고려해보께. 어떻게 할래?" 


 칭찬과 격려를 곁들인 말씀을 구구절절 해주셨지만, 요약하자면 '팀을 옮기더라도 퇴사는 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부서 이동에 대한 제안을 듣고는, 짧은 시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다른 부서 가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힘들어하지 않고, 여느 직장인들처럼 회사를 잘 다닐 수 있을까? 내 대답은 'No'였다. 직장에 오래 다닌 건 아니지만, 다니는 동안은 줄곧 다른 이들보다 일머리가 안 좋고 자신감도 부족하다 생각해왔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그런 내가 부서를 옮긴다 해도, 얼마 안 되어 퇴사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중국어 역량 하나로 이 회사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른 부서로 가서 일한다고 한다면… 주변에서도 곱게 보진 않을 터였다. 회사에 실제로 그런 케이스의 선임 한 분이 계셨고, 그를 향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과 말들이 오갔기에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 자리에서 딱 잘라 얘기하진 못했지만, 나는 여기 남든 팀을 옮기든 그건 중요치 않았고, 오직 '퇴사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제 입장에서 팀을 옮기는 건… 당장은 모르겠고, 지금이 너무 힘들어서요. 지금으로서는 그냥 그만두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부터 고객 대응에선 아예 손 떼. L이 대신하는 걸로 하고. O사원 있을 때처럼 H 니가 서브로만 도와줘. 그 정도는 괜찮제. 일단 오늘 바로 퇴근하고, 며칠 간 쉬면서 잘 생각해봐. 병원 가서 상담도 받아보고, 그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오케이?"


 그렇게 퇴사 면담은 끝이 났고, 세 번째 퇴사 선언도… 실패로 돌아갔다. 2번의 퇴사 실패 이후, 마지막 삼세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퇴사할 거라 다짐했다. 그토록 퇴사를 갈망해왔던 내게 이번 퇴사 면담은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팀장님과 J책임님은 여지를 조금도 남겨주지 않았고,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퇴사 실패의 원인에는 나에게도 있었다. 그땐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 자신에게 한번 더,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멘탈이 약해서 또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아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낙인을 스스로에게 찍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정신과 치료에 희망을 걸었던 것도 있었다. '병원을 다니면서 상담치료를 받으면, 약을 먹으면 조금씩 괜찮아지지 않을까.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일말의 희망을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 나간다기에는 할 일이, 먹고 살 만한 일이 없었다.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나가서는 다시 취업 준비를 해야 할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 어떤 것이라도. 나는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도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그래, 퇴사해'라는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채 회의실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복도에서 J책임님이 말을 건넸다.


"오늘 쉴래? 팀장님 말씀처럼, 짐 싸서 바로 부산 내려가든가." 

"아뇨. 일단 오전엔 일하구요. 처리할 거 좀 많아서." 

"됐다, 일 내가 하께. 그냥 가라." 

"급한 거 하고, 오전만 하고 가께요." 


 그날 오후부터 주말까지 5일을 쉬었다. 이날 오후와 목요일, 금요일은 연차를 썼고. 평소 같았으면 하나하나 세어가며 아끼고 아꼈을 연차였겠지만, 당장 죽을 것 같은 심리적인 고통 앞에서 하루 이틀의 연차는 아무 의미 없었다. 

이날 처음 갔던 구미역.

 점심식사도 거른 채 회사를 빠져 나왔다. 기숙사에서 쉬다가 기차 탑승시간 1시간을 앞두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그간 한번도 이용한 적 없었던 구미발 부산행 기차를 처음 탔다. 부산 갈 땐 매번 시외버스를 이용하곤 했었는데, 코로나19 여파로 평일 차편이 모두 끊겼기에 어쩔 수 없이 기차를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기차에 대한 낭만이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낭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가는 내내 기차 안에서는 참 많은 생각이 오갔다.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이 모든 게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병원 가서 치료받고 나아지면 좋겠다'였다. 



- 처음 찾아간 정신건강의학과.

 다음날 오전. 미리 알아본 병원으로 길을 나섰다. 마침 집 근처에 위치한 병원. 실제 거리 상으로는 걸어서 15분이 채 안되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천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마음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다 필요 없고, 그냥 약 먹고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들만 가득했다. 이미 심적으로 많이 무너져 있던 나였다.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병원. 출입문을 열고 쭈뼛쭈뼛 들어가니 간호사 한 분이 접수를 도와주셨다. 


"안녕하세요. 초진이세요?" 

"저… 어제 전화했었는데요. 접수 좀 하려구요. 예약은 안된다고 하셔서." 

"아, 여기 접수 명부에 이름이랑 연락처 적어주시구요.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접수를 마치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는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병원은 그리 크지 않았고, 대기실이라고 해봐야 의자 몇 개 놓여있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대기실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심지어 대기 순서에서 밀린 사람들은 밖에서 줄을 선 채로 기다릴 정도. '나처럼 이렇게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니.' 사실 나조차도 정신과, 정신건강의학과라고 하면,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들 무리 중 하나였으니까. 팀장님이 해주신 말씀처럼 감기 걸리면 찾아가는 병원처럼 정신건강의학과도 그런 곳이었다. 우울증도 마음의 감기라고 하지 않나. 


"H님. 저 따라 오시겠어요?" 


 수 십 분을 기다린 끝에, 간호사분의 안내로 진료실이 아닌 검사실로 들어갔다. 독서실처럼 보이는 작은 방에는 칸막이 책상과 그 위에 올려진 검사지 몇 장, 그리고 모나미 펜이 있었다. 


"초진 환자분들 진료하기 전에, 이렇게 간단한 심리검사를 먼저 진행하거든요? 잘 읽어보시고 해당하는 항목에 체크만 해주시면 돼요. 응답하시는 데 문제는 없으시죠?" 

"네네, 괜찮아요."


 문항은 엄청나게 많았다. 간호사의 말은 반어법이었는지, 검사 내용도 그리 간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검사지 위에는 정체모를 영문 약자들이 적혀있었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검사 명칭이었다. 간이정신진단검사(SCL-90-R), BAI(불안척도검사), BDI(우울척도검사) 그리고 문장완성검사. 각 항목들에 하나하나 답해나가다보니, 시간은 어느덧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처음 작성했던 심리검사지.


"선생님, 여기 다 작성했는데요." 

"빠뜨린 항목은 없으시죠?"

"네네, 없어요."

"잠깐 앉아계셨다가 호명되시면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오래지 않아 내 이름이 불렸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전 22화 세 번째 퇴사 선언 : 그렇게 나는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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