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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Oct 16. 2020

이겨내려 노력해봐도 찾아오는 위기들.

(24) 이제 그만 내려놓자.

-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위기, 그리고 약물치료.

 긴 휴식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구미. 회사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먼저는 업무 최전선에서 물러났다는 것.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팀장님과 책임님과의 상담이 이어졌다.


"H, 병원 갔다 왔나?"

"네네."

"뭐라든데?"

"음… 조금 많이 안 좋다고 하시더라구요. 우울증에, 신경쇠약, 번아웃까지… 있다고…"

"…… 그래. 그라믄 저번에 얘기한 거처럼, CS 업무는 L이랑 내가 맡는 걸로 하고 니는 서브로만 도와주는 걸로 하자."

"네에… 죄송합니다."


 결국 고객 대응 업무에서는 이렇게 손을 떼게 되었다. 4주를 쉬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도 말씀드렸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 또한 그대로 쉬고 싶지는 않았다. (아예 퇴사하는 거면 모를까.) 다만 업무량 조절이라는 타협점을 찾아, 점심시간에는 사무실에서 벗어나 바깥공기를 쐬며 산책도 하고 독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었음에도 예전에는 너무 바빠서 누릴 수 없던 일상이었다. 퇴근 시간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오후 5시 30분 정시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작지만 큰 변화였다.


 그 뒤로 몇 주 간,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한 통원 치료가 이어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도시 간 이동을 자제하는 와중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구미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매주 토요일 병원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큰 위로와 치유를 얻었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면서. 사실 상담치료가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솔직한 대화, 꾸밈없는 감정 그대로를 공유하는 것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꺼내면, 그토록 우울했던 마음과 나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들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인지 월화수목금 5일 내내 토요일만 기다리곤 했다. 이렇게 작지만 큰 변화들을 통해 나를 옥죄었던 삶에도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는 듯 보였는데….




 하지만 오랜 시간 조금씩 쌓여왔던 스트레스와 마음의 병은, 마치 악성 암 종양처럼 온몸에 퍼져 있었고 내 정신까지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여전히 사무실에선 숨 막힐 듯한 중압감이 있었고, 전화벨 소리가 귀에 닿을 때면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휴대폰 전화 수신은 모두 차단해두었고, 라인이나 카톡 알림도 무음으로 해두었다. 불안장애를 넘어 신경과민 수준까지 오게 된 와중에, 하루는 일이 터졌다.

 예전 이야기에서도 몇 번 등장했던 전산팀 P팀장과의 트러블이었다. (전에는 책임 직급이었지만, 이 무렵 팀장으로 진급했다.) 어떤 일이든지 사소한 일을 크게 만들고 늘 딴지를 걸었던 그가, 이번에도 트집을 잡으며 업무 요청에 협조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P팀장님, 안녕하세요. 품질팀 H사원입니다."

"어, 그래. 웬일이야."

"이번에 H사에서 출하 성적서에 열 하나 추가해달라고 요청이 와서요. 바쁘시겠지만 검토 좀 부탁…"

"지금 이게 창고에 있는 자재가 있나?"

"아니오. 자재랑은 상관이 없고, 출하 나갈 때만 최종 생성되는 전산 데이터입니다. 원 데이터는 내부 공정 진행할 때 생성되는데, 최종적으로 나오는 거랑은 무관하구요…"

"아니, 내부 공정은 모르겠고, 지금 데이터가 다 있냐고."

"이 데이터들이 출하 나갈 때 생성되는 거라서, 지금 최종 데이터는 없는 상황입니다. 혹시 셋업 가능한 대략적인 일정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아니, 니가 자료를 먼저 줘야 일정을 주던가 말던가 하지."

"아뇨.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데이터가 당장 생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열만 하나 추가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문제 생기면 그때 얘기하자고 하고 있구요. 고객사 쪽에서는 대략적인 예상 일정만 먼저 달라네요."

"하, 진짜. H사원 답답하네."


 답답한 건 내 쪽이었다. 요청사항은 간단했다. 전산 시스템에 추가로 입력할 열, 한 줄만 만들어주면 되는 거였다. 고객 쪽에서는 일단 만들어놓고 문제가 있으면 논의해서 해결하자는 의견이었고. 전혀 트집 잡을 게 없는 상황. 나는 이러한 객관적인 상황과 내 입장을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었지만, P팀장은 누가 봐도 감정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쏘아붙이기만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매일매일 싱숭생숭했던 마음에 손 대면 터질 듯한 폭탄 상태였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할 상황까지 다다랐고, 심호흡 몇 번 뒤 이렇게 얘기했다.


"아니, 근데 팀장님은 원래 말씀하실 때마다 이렇게 쏘아붙이면서 말씀하세요?"

"……" 


 전산팀 사무실엔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다른 책임님들과 선임님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3초 후, P팀장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그는 고함을 질렀다.


"너 나가! 다시는 전산팀 오지 마!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저희 팀장님께 따로 말씀드릴게요."


 조곤조곤하게 얘기는 했지만 사무실을 빠져나와 돌아갈 때는 이미 쒸익쒸익 대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 한 두 방울이 맺혔으며 손과 발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팀장님과 책임님께 이 상황들을 다 말씀드렸다. 멀쩡했던 애가 갑자기 잔뜩 흥분한 채로 손을 벌벌 떨고 있으니, 두 분 모두 어안이 벙벙하면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고 나서 돌아온 팀장님의 대답은.


"잘했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사무실에선 내 감정과 몸을 컨트롤하기 힘들었고, 팀장님은 나를 흡연장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분하고 억울해서 몸이 벌벌 떨릴 정도가 되니, 이 정도면 많이 심각하다는 걸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팀장님은 전산팀 P팀장 성격이며 말투가 입사할 때부터 그랬던 사람인지라, 회사 내에 안 부딪힌 사람이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내가 담당자이고 이 일을 마무리 지을 사람은 나뿐이었다. J책임님의 중재로 업무는 어찌어찌 처리되었고, P팀장님에게 따로 사과를 하고는 이 사건도 일단락되었다.




 이 일은 마무리 지었지만, 그 여파는 너무 컸다. 정신 안정도가 0에서 100까지라고 한다면, 나는 이미 0의 지점을 뚫고 들어가 마이너스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 주 토요일에 바로 찾아간 병원에서 이날 있었던 일과 그때 느꼈던 감정들, 스스로도 인지할 수 있었던 신체 이상 증상들을 말씀드렸다.  


"... 저번  병원 갔다 와서는 조금 괜찮아졌었는데, 다시 직장 돌아가서 일하니까 똑같이 우울하고 힘들었어요. 계속 출근은 하고 있구요. 직무도 그냥 그대로네요. 며칠 전에는 다른  팀장님이랑 트러블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닌  같은데, 그때는 정말 손발이 떨리고 감정이 격해졌었어요. , 그리고 감정조절이   되는  같아요. 작은 일에도 감정이 욱해지고 눈물부터 나오고, 일할  갑자기 멍해지고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아졌어요. 갑자기 그러니까 엄청 불안하고 무섭고…"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으셨고, 이내 모니터를 내쪽으로 돌리고는 뇌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면서 내 상태를 의학적으로 설명해주셨다.


"얘기 들어보니까, 지금 H씨 상태가… 제가 생각했던 수준보다 많이 심한 것 같아요. 감정 조절이 어렵고,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하시니…. 멍해지고 이런 거는 이 사진으로 설명드릴게요. 왼쪽은 정상 수준의 뇌 활동일 때의 뇌 사진이고, 오른쪽은 판단력이 낮아질 때의 뇌 사진이에요. 왼쪽을 보면, 붉은색 부분이 많죠? 이게 뇌 활동이 활발한 걸 의미하는데. 반대로 오른쪽은 어둡죠? 이게 컴퓨터로 치면, 셧다운이에요. CPU가 정지되는 거죠.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정지되어서 판단력도 흐려지고 결정을 못 내리는 거예요. 이런 증상들이 환자들 중에는 운전할 때 많이 나와요. 운전이란 게 엄청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에서 많은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환자들 중에서 운전할 때 멍해지는 경우가 있어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종종 있어요. H씨도 업무 하면서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와서 이걸 다 처리를 못해서 순간 멍해지고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말을 들으니 정말 공감이 많이 되었고, 나도 운전을 했다면 그런 상황이 생겼을 것만 같았다.


"감정, 신체, 인지능력이 전반적으로 다 떨어져서 이런 증상들이 나오는 거구요. 일단 환자분이 괜찮으면, 약을 처방해봅시다. 상담치료랑 약물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항우울제 들어보셨죠? 우울의 정도나 불안 정도를 완화시키는 거구요. 일단 처음이니까 하루에 두 봉, 아침저녁 한 봉씩 그렇게 드시면 될 것 같아요."

"네네, 알겠습니다."


 분명 처음 진료받을 땐 약물처방 없이 상담치료만 진행하자고 하셨었는데, 금세 상태가 악화된 걸 아시고는 이렇게 결정하신 듯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처음에 하고 싶었던 대로 처방전을 받고는 진료를 마쳤다. 병원 아래 약국에서 처방받은 항우울제를 잔뜩 받아 들고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항우울제까지 처방받기에 이르렀다.



-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불안, 공황 발작.

 증상은 좋아졌다 안 좋아졌다를 계속 반복했다. 병원에서 진료받은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괜찮다가도, 주말을 앞둔 목요일, 금요일만 되면 불안 증상이 심해졌다. 공황 발작이 찾아온 것도,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금요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사무실. 업무를 재개하려는데, 정체 모를 불안감과 공포감이 나를 덮쳤다. 몸에서도 이상 징후를 보였다. 모니터에 있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고,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세수도 해봤지만,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서도 불안과 공포 상태는 지속되었다. 숨은 가빠오고, 식은땀도 줄줄 흐르게 된 상태. '아, 이거 이상하다.'

 당장 사무실에서 뛰쳐나와서는 병원에 전활 걸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볼 곳이 병원 밖에 생각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원은 아직 점심시간이었는지 전화는 연결음만 이어졌고, 숨만 계속 가빠왔다. 말로만 듣던 공황 발작인가 싶어서 평소 공황장애를 겪어온 친구에게도 전화를 해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질 않았다.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은 사내 양호실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H씨, 어디 안 좋아요?"

 

 얼마 전 의료비 정산 때문에 찾아와서 내 상태를 말씀드렸던지라, 이상함을 직감하셨나 보다. 겉으로도 심히 안 좋아 보이는 안색이기도 했고.  


"숨이 안 쉬어지고, 식은땀나고… 너무 불안해서…"

"원래 공황 증세 있었어요?"

"아뇨, 없었어요. 그냥… 갑자기 모니터에 있는 글씨 안 보이고, 심장이 떨려서… 청심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네네, 드릴게요. 일단 여기 누워서 진정 좀 시켜요. 팀장님이나 책임님도 알고 계세요?

"아뇨, 모르세요. 그냥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청심환을 받아먹은 후,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했다. 십 여 분을 가만히 누워있으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왜 이렇게 됐을까, 뭐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불안 해졌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원인을 알았다면 진작에 고쳤겠지만… 이미 심각한 정도를 넘어선 수준이었기에 원인을 안다손쳐도 고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 '아, 안 되겠다. 이렇게 계속 회사를 다니는 건 몸만 더 상하게 하고, 더 하다가는 진짜 죽겠다.' 

 정말 마지막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이 고통의 끝은 결국 내가 제 발로 이곳을 떠나는 것. 사실 그동안은 준비 없이 단순히 도피형 퇴사만 생각했었고, 그랬기에 세 번이나 퇴사 선언을 했음에도 나가질 못했던 것 같았다. 퇴사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이 생각났고, 나도 그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이제, 그만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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