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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Oct 14. 2020

저, 우울증인가요?

(23) 마음의 병 치료기 2. 

 그렇게 들어간 진료실에는 오십 줄에 들어선 듯한, 인상 좋은 원장 의사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H씨?"

"네네."

"앞에 앉으시고, 편하게. 네. 편하게 그냥 하고 싶은 얘기 해주시면 돼요." 


 검사 결과에 대한 내용이나 질문들로 상담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내게 먼저 이야기하라고 하셔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내가 병원에 왜 왔는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 최근 정신상태와 감정들이 어느 정도인지, 이런 것들을 담담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 일단 저는 지금, 구미에 있는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고 있구요… 다니기 시작한 지는 2년 조금 안 됐어요. 일은, 중화권 고객 상대로 품질 이슈를 처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 2년 다니면서 계속 이 일이 저한테 안 맞다는 생각을 했었고… 최근에는 정도가 많이 심해져서 안 좋은 생각만 계속하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상담 치료를 받아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네. 혹시, 안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니까. 저도 모르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 고역이고. 돈은 부족하지 않게 벌고 있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지금 당장은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고, 그렇네요."

"음, 좋아요. 지금 H씨 얘기만 들어봐도,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겠어요." 


 의사 선생님은 검사지를 쭉 훑어보시더니, 다시 입을 여셨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흐음. 지금 H씨 상태가 심한 건 맞아요."

"저, 우울증인가요?"

"바로 진단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불안과 우울 정도가 심한 걸 봐서는 우울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예전엔 안 이랬거든요. 스트레스가 있었어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정도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무너진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에요. 어쨌거나, 지금 이 상태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절박한 마음이었다. 매일 우울과 좌절 속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알 수 없다. 그때의 나는, 지금으로선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와 불안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아니, 해야 했다. 일차원적으로는 퇴사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또다시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정신과 상담치료 그리고 약물 치료였다.


"가능하면, 약물 치료도 병행하고 싶어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예전의 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고, 다 훌훌 털어버리고 싶거든요."

"음… 약물 치료는 시일을 더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H씨도 아시겠지만, 이 약물이라는 게 사람마다 부작용도 있고 중독성이 있어서, 쉽게 의존해서는 안되거든요. 오늘이 첫날이니만큼 지금 H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완전히 파악하기가 힘드니까, 내일 추가 검사를 받고 다시 진료받는 걸로 합시다."


 약물 치료에 대한 의지까지 피력했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극구 말리셨다. 하긴, 첫날인데 약 먼저 지어달라는 사람에게 처방전을 바로 지어줄 수는 없었을 터. 다음날 더 깊게 상담해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나는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통원 치료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음날, 두 번째 진료.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 약간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전날 상담을 마치고는 어느 정도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날 있을 상담 진료에 걱정 반 떨림 반이었다. 마치 면접을 준비하는 것처럼, 의사 선생님이 어떤 질문을 던질지 그리고 이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까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날처럼 내 상태와 증상들을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나열할 것만 같았다. 이왕이면,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게 진료받는 게 좋지 않는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대기실엔 전날처럼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진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틈 사이에 끼어 순서를 기다렸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 이름이 불렸다. 


 "H님. 검사실로 들어오세요. 추가 검사가 있어서 20분 정도 짧게 하시면 돼요." 


이런 요상한 기계들로 검사를 받았다.


 간호사를 따라 들어간 검사실. 전날 검사 때에는 보지 못했던 이상한 기계들이 놓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심전도 측정기 정도 되는 것으로 보였다.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예상했던 20분보다는 길어졌지만, 그래도 1시간 안에 신경 검사를 마쳤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기다리기를 십 여 분. 진료실로 들어오라는 안내에,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진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제 상담하고, 마음은 좀 어땠어요?"

 "음… 뭔가 조금 내려놓았다는 기분?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음, 좋아요. 오늘도 편하게. 그냥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얘기 하시면 돼요." 

 

 이날도 의사 선생님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그저 편하게 해 보라는 말씀만 하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전날 상담 이후의 감정과 기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제 상담하고 나서는 좀 후련하기도 했고, 제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회사 동료나 상사분들한테 얘기해도 그 사람들은 제 이야기에 공감을 잘 못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잘 해내는데, 너는 왜 못하냐. 이런 식으로도 얘기하고… 그래서인지 더 숨겨놓고 얘기를 안 하고, 혼자 누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어제 와서 얘기하고 그러니까, 병원 와서 치료받으면 조금 나아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의사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들으시는 동안, 중간에 내 말을 한 번도 끊지 않으셨다. 사소해 보이지만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던 나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시고, 진심으로 대해주시려는 것 자체가 큰 힘이었다. 설령 그가 가진 직업이니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 해도, 그런 점 때문에 마음이 더 안정되었고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길 털어놓으면 '아냐. 네가 틀렸어.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져야지'라는 식으로 고치려 하고 훈수 놓기에 급급했다. 내 감정과 상태보다는 해답을 제시하려는 그들의 태도에 지치기도 했고,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다. 


"네, 좋아요. 일단 H씨가 이렇게 본인의 상태를 알고, 개선하려는 의지로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큰 변화의 시작이에요. 엄청난 용기고, 좋은 자세예요. 실제로 저희 병원에 찾아오시는 많은 환자분들이 그런 용기를 가지고, 조금씩 이겨내고 좋아져서 병원 다시 안 오시곤 하니까요."


 나도 그들처럼 어느 순간 마음의 병이 씻은 듯이 다 낫기를 바랐다. 나는 그 출발선에 서있는 것이었고.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취합하고는 이렇게 얘기해주셨다. 


"어제오늘 검사 결과를 보니까… H씨의 현재 심리나 정신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일단 불안 정도가 아주 심각한 정도구요, 우울 정도도 심한 축에 속하네요. 제가 검사 결과를 보니까, H씨는 전반적으로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이에요. 같은 스트레스의 정도라도 다른 사람들은 잘 이겨내는 반면, H씨는 성격이나 성향 자체가 원래부터 스트레스에 약한 쪽이거든요. 그래서 더 힘드셨을 거고. 음… 진단을 내리자면, 지금 하고 계신 일 있잖아요? 직장 다니고 계시는데, 일을 4주 정도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4주나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심해져 있던 건가.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4주를 쉴 수는 없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고 남아있을 팀원들에게도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 명이 빠지면 팀에 얼마나 큰 손해인지,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4주요? 4주까지는 안 될 것 같은데…"

"회사에서 안된다고 하려나요? 그러면 2주라도 쉬는 건 어떨까요? 지금 H씨는 업무를 하기 힘든 상태예요.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 오래 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은 팀장님과 책임님께 진단 결과만 말씀드리고, 업무량을 조절하는 쪽으로 생각했다.  


"쉬는 동안 운동도 하셔야 합니다. 집에서 쉴 때는 휴대폰만 보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끔 해야 해요. 운동이 제일 좋구요, 산책도 좋아요. 그리고 약물 치료까지는 일단 권하지 않아요.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약에 의존하게 되고, 이 증상들을 치료하더라도 다른 부작용 때문에 고생할 수도 있구요." 

"네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H씨가 지금 회사를 그만두는 쪽으로도 생각하고 계시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도 갈 곳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을 조금 쉬거나, 아니면 업무를 변경하거나 하는 방법이 나을 것 같네요. 다른 직장을 찾는다 해도, 사실 거의 똑같을 겁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H씨 성격 자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하니까요." 


 순간 나 자신을 원망했다. '나는 왜 남들과 다른가. 왜 다른 이들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이 위기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것인가.' 스스로를 그렇게 원망하고 있을 때, 의사 선생님이 다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도 괜찮아요. 마음의 병도 나을 수 있어요. 밸런스를 조절하고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면, 괜찮아질 수 있거든요."

"네네. 그러면 혹시… 진단 결과는 어떻게 보면 될까요…?"

"음… 딱 어떤 질환이다라고는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우울증 증세가 있구요. 신경쇠약에, 번아웃 증후군도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뭐, 이런 상황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잠시 일을 쉬는 게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업무량이라도 조절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날 진료는 이렇게 끝이 났다. 다음 진료일 날짜를 정해놓고는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가진 병명이 '우울증'이라는 걸 애써 공식화하지 않으려 하셨다. 환자에게 더 큰 부담과 충격을 주는 걸 막기 위함이었던 걸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나 배려가 어찌했든, 나는 결과적으로 우울증과 신경쇠약 그리고 번아웃까지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 환자가 되었다.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 죽어라 일하고 갖은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얻은 것이 고작 우울증이라니. 신경쇠약과 번아웃이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팀장님과 책임님께 전활 걸어, '우울증이랍니다. 4주나 쉬어야 한답니다. 출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내가 병원을 찾아간 이유가 뭐였나. 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힘들겠지만, 나는 이겨내 보기로 결심했다. 




이전 23화 퇴사 면담과 정신과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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