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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16. 2020

국내 출장 소동기.

(15) 목적지가 코앞인데 못 들어간다니요!  

 직장생활 동안 중국이나 대만으로의 출장 업무는 잦은 편이었지만, 국내에서의 출장은 거의 없었다. 담당 고객사가 중화권 회사이기도 했고, 국내 업무는 모두 국내파트가 전담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갔던 국내 출장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 횟수가 너무 적었던 지라 횟수며 사소한 일까지 다 기억날 정도. 첫 출장은 앞에서도 나온 인천공항 물류센터 출장, 두 차례의 교육 출장, 그리고 이번 이야기에서 다룰 SK하이닉스 출장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SK하이닉스로의 출장은 아니었고 SK하이닉스 내에 위치한 협력사로의 출장이었지만, 편의상으로나 기억상으로나 내겐 SK하이닉스 출장이었다. 


"H, 이번에 이천 출장 좀 갔다 와라." 

  

 에피소드는 J책임님의 이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면허 있잖아. 바람 쐴 겸 한번 쓱 갔다 와." 

 

 다행히 그 무렵 업무가 그렇게 많았던 건 아니었고, 마침 나도 기분 전환할 겸 리프레쉬가 필요했다. 뭔가 자극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랬기에 출장을 다녀오라는 책임님의 말씀이 반갑기도 했지만, 혼자서는 조금 무리였다. 


"저 혼자요? 운전 아직 잘 못하는데…"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차를 구매하지 않았고, 때문에 면허증은 자연스레 주민등록증을 대체한 신분확인용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기분전환용 출장이라 할 지라도, 분명 어떤 미션 같은 것이 내게 부여될 것이니 그렇게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운전 못 해? 저번에 보니까 할 줄은 알더만." 

"아, 할 줄은 알죠. 근데 회사 차로 사고라도 내면…"

"그래, 안 되겠다. 면허도 간신히 딴 놈한테… 흠… O도 출장 때문에 안되고, 그렇다고 J를 보낼 수도 없고…"


 다행히 책임님도 내가 삼수 만에 1종 보통을 겨우 땄던 걸 기억하고 계셨고, 나 홀로 운전대를 잡게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셨는지 단독 출장 의견은 바로 철회하셨다. 한참을 고민하던 책임님은 사무실 저 멀리 앉아있던 한 사람을 불렀다. 


"Y! 자리로 와봐!" 

 

 2층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던 옆 부서 Y사원이었다. 앞서도 몇 차례 언급된 것처럼 그는 우리 팀과 관련된 업무들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매일 같이 우리 팀을 찾아오곤 했다. 업무적으로도 상당 부분 얽혀있고, 친분으로도 굉장히 가까웠던 Y사원이 내 출장 동료로 선택된 것이다. 


"네, 책임님. 왜요?" 

"지금 바쁜 거 없제. 이번에 이천 좀 갔다 와라." 

"에? 갑자기요?" 

"H랑 같이 갔다 와라. N사 박스 드랍 테스트하는 거 알제. 그거 업체 맡겨서 테스트해야 되는데, 퀵으론 안된다데. 가서 제품만 맡기고 오면 되니까 갔다 와라." 

"음… 팀장님께 한 번 여쭤볼게요." 

"내가 얘기해놓으께." 

 

 굳이 Y사원이 갈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운전을 못하기도 했고 그나마 업무적으로 관련 있었던 Y사원에게 약간은 귀찮은 부탁을 하게 되었다. 몇 시간 뒤, 옆 부서 L팀장님도 출장을 허락하셨고 결과적으로는 Y사원과 함께 경기도 이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출장은 그로부터 사흘 후 가게 되었다. 




 출장 당일.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부지런히 출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혼자 중얼중얼 준비해야 될 것들을 챙기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J형님이 말을 건넸다. 


"제품 박스 챙겨놨고… 명함 챙겼고… VPN 설정 확인해놨고…" 

"H, 방문자 등록 해놨나? 다른 회사 갈 때 미리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방문자 등록해야 된디. 알제?"

"아, 업체 갈 때도 해야 돼요? 타사에서 저희 쪽 방문하는 거 말고도?"

"해야지. 언능 해놔라. 가서 입구컷 당한디." 


 어느 회사든 보안 상의 이유로 협력사 담당자, 고객 등 외부인이 회사에 출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일정 절차, 그러니까 방문자 등록이 필요한데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업체에 맡길 제품 박스 챙기느라고 정신없기도 했었고, 애초에 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기 때문. 우리가 가야 할 업체의 위치를 지도로 찾아보고 나서야 그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SK하이닉스 이천사업장. 출발 1시간 전에 알게 된 사실. '어? 큰일 났네? 이거 책임님 아시면 한 소리 듣겠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부리나케 업체 담당자에게 연락을 하고는 방문자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L사 QA팀 H사원이라고 합니다. 혹시 S책임님 되시나요?"

"네네, 맞습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오늘 박스 드랍 테스트 때문에 내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저희가 방문자 등록을 안 했어서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어요." 

"아, 안 그래도 어제 J책임님이랑 통화했었는데. 그… 방문자 등록은 SK하이닉스 홈페이지 들어가셔서 인터넷으로 해주시면 돼요. 도착하시고 나서 전화 주시면 저희가 나갈게요. 외부인이 바로 들어오는 건 안돼서요." 

"네네. 감사합니다. 바로 등록해놓을게요. 감사합니다." 

 

 Y사원과 함께 SK하이닉스 방문등록 안내 페이지에 접속해서는, 개인 정보와 소속 정보를 기입하며 등록을 진행해나갔다. 절차에는 안전이며 보안 관련 서약과 각종 교육도 포함되어있었다. 짧은 교육 끝에는 퀴즈도 있었는데, 80점 이상을 받아야만 다음 절차로 넘어갈 수 있었다. 우리 회사도 이러한 방문자 등록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복잡하진 않았다. '글로벌 기업이라 그런지 별 게 다 있네' 하며 마침내 등록 절차를 마쳤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등록했던 정보에 문제가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Y씨, 준비 다 했죠? 가죠, 이제." 

"네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바로 갈게요." 


 나는 Y사원과 함께 경기도 이천으로 향했다. 구미에서 이천까지는 차로 대략 2시간 반이 걸렸다. 운전 미숙으로 인해, 가는 길에는 Y사원이 운전을 담당했다. 이동하는 내내 회사 얘기며 개인적인 얘기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Y사원은 나와 같은 92년생에, 전에 사석에서 술자리도 몇 번 가졌기에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었다. 친분으로는 회사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가까운 동료였다. 그 때문인지 이천까지의 여정은 굉장히 짧게 느껴졌다. 



  

입구컷 당했던 SK하이닉스. (출처 : SBS뉴스)


 목적지인 SK하이닉스 이천사업장 근처에 다다라서 나는 담당자 S책임님께 전화를 드렸다.

 

"네, 책임님. L사 H사원입니다. 저희가 이천에 들어왔는데요. 몇 시쯤 저희가 들어가면 좋을까요?" 

"곧 점심시간이라… 식사는 아직 안 하셨죠?" 

"네네." 

"저희랑 먹는 게 불편하시면 식사하고 오셔도 됩니다. 한… 1시쯤 입구 도착하셔서 연락 주시면 될 것 같네요." 

"네네. 저희도 그냥 먹고 들어갈게요. 이따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점심식사를 금세 해치우고 시계의 시침이 1에 가까워질 때쯤, 나와 Y사원은 SK하이닉스 이천사업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시 한번 업체 담당자 S책임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우리는 방문자 확인 절차를 위해 경비실처럼 보이는 고객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엔 꽤 많은 사람들이 출입자 명부를 작성하고 신원 확인에 열중이었다. 우리도 그들 틈에 끼어 신원 확인에 나섰다. 접수처로 가서 여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Q사 내방하러 왔는데요." 

"신분증이랑 명함 보여주시겠어요? …… 명함에 있는 회사 이름이랑 등록된 회사 이름이 다르네요?" 

"아, 저희가 얼마 전에 사명은 변경해서요. 앞에 영문만 추가됐어요." 

"죄송한데, 명함에 있는 회사명이랑 등록해주신 회사명이랑 같아야 하거든요. 저 뒤에 있는 컴퓨터로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겠어요?" 

"아, 네." 


 이때부터 '설마 못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뒤편에 있는 컴퓨터로, 오기 전에 등록했던 소속 회사 정보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회사 이름을 밝힐 수는 없으니 SK하이닉스로 예를 들자면, 예전에 회사 담당자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한 사명은 '하이닉스'였고, 이번에 사명을 변경하며 받은 명함에는 'SK하이닉스'로 쓰여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소위 '입구컷'을 당한 것이다. 


"아니, 같은 회사라니까요? 사업자등록번호도 같아요." 

"안돼요. 무조건 같아야 돼요. 저기 뒤에 계신 분들도 다 사명 달라서 못 들어가시고 있어요." 

"하… 그럼 못 들어가는 거예요? 같은 회산데?"

"네네, 안돼요. 회사 방침이 그래요. 뒤엣분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매정하고 단호한 여직원의 태도에 한번 놀라고, 황당한 회사 방침에 또 한 번 놀랐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같은 회사라는 걸 사업자등록번호까지 들이대면서 보여줘도, 안된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뒤쪽 입구엔 여직원의 말처럼 사명이 달라 못 들어가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협력사 직원들이 여럿 보였고, 그들은 언성 높이며 직원과 투닥대고 있었다. 황당하긴 해도 저렇게 언성만 높인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 

 

"H씨, 어떡해요? 경영팀 P책임님한테 물어볼까요?" 

"아, 이거 방법 없는 것 같은데. 일단 전화로 한번 물어봐주세요. 저는 Q사 S책임님한테 물어볼게요. 방법 없는지." 

 

 갖은 방법을 다 찾아봤지만, 우리가 SK하이닉스 사업장 내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 망했네. 회사 돌아가면 뭐라 보고하지.' 미팅은 고사하고, 완벽하게 임무 완수를 못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복귀를 걱정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졌지만, 다행히 제품을 전달할 방법은 있었다. 


"아, 책임님.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테스트할 제품은 전달해드려야 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그쪽에서 안된다면 절대 출입이 안되셔서. 그러면, 이렇게 하죠. 저희가 나갈게요. 근처 카페 같은 데 계시면, 저희가 제품만 받아서 들고 들어오면 되니까요." 

"아유, 죄송합니다. 테스트하는 건 못 봐도, 일단 전달은 그렇게 해야겠네요. 죄송해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저희 나가면 시간 딱 맞을 테니까 메시지만 남겨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결국. 나와 Y사원은 종착지인 SK하이닉스 사업장을 코앞에 두고, 정-말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한 카페가 있었고, 우리는 그곳을 미팅 장소로 결정했다. 몸집만 한 제품 박스를 들고는 카페로 들어갔고, 오래지 않아 선한 인상의 담당자 두 분이 들어오셨다. 


이런 분위기의 카페에서 미팅을…


"아유,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안녕하세요. 책임님이야말로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죄송합니다." 

 

 아마 두 분 모두, 이렇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사원 둘이 찾아와서는 카페에서 회의를 해야 된다는 상황이 어이가 없으셨을 듯하다. 너무 창피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카페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카페에서의 미팅은 그 어느 미팅 때보다도 진지했다. 테스트 목적과 고객사가 제시한 조건 등을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드렸고, 이에 대한 의뢰 비용과 일정까지 모두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팅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그러면 내일까지 테스트 진행하고, 레포트랑 견적서, 세금계산서는 끝나는 대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넵! 감사합니다, 책임님."


 그때 당시 생각으로는, 사원 둘이서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 나름 잘 대처한 것 같았다. 놀라기도 많이 놀랐고,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하나 했었는데, 나름대로 잘 끝마쳤으니까. 그래서인지 복귀하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H씨, 운전해볼래요?" 

"에? 안돼요, 저 면허 딴 지 몇 달 안됐는데." 

"면허 따고 한 번도 운전 안 했어요?" 

"어… 두 번 정도?" 

"해봤네~ 이따가 휴게소 가서 차키 줄테니까 이거 한번 운전해봐요." 

"아, 안될 것 같은데." 


 돌아오는 길에 한 휴게소에 들러서는 회사 소유의 아반떼를 몰아봤다. 이때가 아마 내 인생 세 번째 운전이었던 것 같다. 시동을 걸고 나서는 바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시속 100km의 속도로 달리는 차들 속으로, 나도 서툴지만 서서히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내가 운전한 아반떼는 한 시간 뒤 구미 시내 퇴근길을 뚫고 마침내 회사에 도착했다. 이날은 여러모로 얻은 소득이 꽤 많은 날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출장 업무도 잘 끝냈고, 운전도 제대로 해봤으니.


 회사로 복귀하고 나서는 이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 드렸고, 의외로 J책임님은 칭찬해주셨다. 

 

"잘했다. 거 뭐 테스트하는 거 볼 필요 없다. 박스 떨어뜨리고 흔들고 하는 거 뿌이지, 봐서 뭐하겠나. 전달만 잘했으면 됐따. Y가 니 운전도 했다데? 다음엔 니 혼자 갔다 온나."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국내 출장 소동기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며 이렇게 끝이 났다. 



이전 15화 조금 우당탕탕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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