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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Sep 09. 2020

두 번째 퇴사 선언 : 도저히 못 버티겠어요.

(13) 완전히 무너져 버린 날.

 대만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매일 이어지는 야근과 특근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품질 이슈는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고, 그 때문에 루틴하게 해오던 업무는 손에도 대지 못했다. 꽤 많은 돈을 받고 있었지만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은 제대로 쓸 시간조차 없었고,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삶에 의욕을 잃은지 오래, 그 어떤 것도 동기부여가 되질 않았으며, 가까운 사람들과는 하루가 멀다하고 감정싸움을 했다. 게다가 스트레스의 근원인 고객사의 불만 섞인 성화에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이 일이 나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시금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을 꾸역꾸역 버텨가던 중, 마침내 폭발했다. 2019년 7월 12일.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두 번째 퇴사 선언, 그날. 얼마나 생생히 기억나냐면, 그때의 기억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려 자판을 제대로 치지 못할 정도. 그럼에도 이 직장생활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에피소드이니, 힘들더라도 다시 꺼내어 보려 한다. 




"H, 내 토요일날 결혼식 있어서 금요일날 연차 쫌 쓰께." 

"아, 네네. 결혼식 준비할 거 많죠?" 

"없을 줄 알았는데, 쪼끔 있네. 뭔 일 있으면 전화하고." 

"네네, 뭐 별 일 없겠죠." 


 사수 O선배는 몇 달 전 중국에서 (지금은 형수님이 된) 중국인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고, 한국에서도 약식으로 식을 올리기로 되어있었다. 약식이긴 해도 준비할 게 많았던 터라 O선배는 내게 미리 연차를 쓴다고 얘기했고, 나는 당연히 별 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선 편히 쓰시라고 말했다. 하필 그날 퇴사 선언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바쁘고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고 그토록 기다리던 금요일이 찾아왔다.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하겠지만, 금요일 퇴근은 상상만 해도 힐링 그 자체. 퇴근 후 술 한 잔 기울이고 주말 내내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버틸 수 있는 한 주의 마지막 날. 나도 그러한 들뜬 마음으로 금요일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은 우리만 하는 건 아니었다. 중화권 고객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객사 담당자들은 금요일만 되면 그간 못했던 업무 요청을 모조리 몰아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월화수목 가만히 있다가 금요일 3-4시부터 왜 그렇게 닦달을 하는지. 평소에도 무리한 요청을 많이 했던 F사의 담당자 S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喂?H,我是S。045A产品重新做完了Test吗?(여보세요, H, 저 S인데요. 045A 제품 Test 다시 다 했나요?)" 

"是的,已经做完了。(네네, 이미 다 했죠.)" 

"那,今天下班前给我相关资料一下。(그러면, 오늘 퇴근 전까지 관련 자료 좀 보내줘요.)" 

"啊?下班前?不可能。现在韩国时间已经是下午4点。并且,担当者不在办公室,他只能看相关资料。(네? 퇴근 전까지요? 안돼요. 지금 한국 시간으로 벌써 오후 4시인데요. 그리고 담당자가 부재중인데, 그 사람만 관련 자료를 볼 수 있거든요.)" 

"所以呢?你们那边弄错啦,你是不是负责人?那你应该有责任感处这件事情啊。对不对? (그래서요? 당신네들 쪽에서 잘못한 거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책임자잖아요? 그러면 당신이 책임 지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죠?)"

 

 담당자 S가 요청한 자료를 만들어 주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사내 프로그램에서 조회할 수 있는 정보였다면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해당 자료는 담당 실무자가 직접 하나하나 봐가면서 만들어야 하는 자료였다. 해당 담당자는 다른 업무로 지금 당장 처리할 여력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요청하는 업무가 이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품질 CS를 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앞서 몇 주 동안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업무를 해왔던 이유로 스트레스가 극도에 치달았던 나는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S, 我刚说了吧。那个资料…Test部门的负责人只能做处理那个资料…。我也想寄给你,但是现在没办法。(S, 제가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그 자료는… Test팀 담당자만 처리할 수 있다구요. 저도 보내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Hey,H。我不管你们的情况,我只要那个资料。(이봐, H. 난 너희 상황이 어떤지는 상관없어. 그냥 그 자료만 필요하다고.)" 


 대화의 진척이 전혀 없는, 무의미한 통화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서로의 입장만 고수하다 보니 나와 S 모두 감정이 격해지면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S는 특유의 쏘아붙이는 말투로 내게 더 많은 걸 요구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부터 그가 말하는 중국어가 한 글자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 흥분하고 당황해서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간 늘 중국어 실력이 부족하다 느껴왔었고, 언제나 그 벽을 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신감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격한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이러한 역량 부족에 대한 스트레스가 나 자신을 집어삼키기까지 했고, '이 일이 나와 맞나,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지 않나'를 늘 고민하던 나였다.

 그랬던 상황에서 받게 된 그와의 통화는 나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었다. 뇌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듯, 그가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는 족족 반대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갔고, 그 대신 패닉 상태처럼 '삐-' 하는 소리가 내 귀에 가득 울려 퍼졌다. 말문을 막힌 입에서는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고, 손은 벌벌벌 떨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 진짜 XX !"


 그렇게 큰 소리로 욕설을 뱉은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갖은 욕설이 난무하는 사무실이었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단 한 번도 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동안 쌓여온 마음의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생겼고, 그 응어리가 나도 모르게 한 마디 욕설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S와의 갈등도 충분한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이성을 읾은 사람이었다.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O선배에게 전활 걸었다. 그리고는 분노, 속상함, 안타까움, 슬픔, 우울함, 미안함, 부끄러움 등 온갖 감정들이 함축된 울음을 터뜨렸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엉엉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서럽게 울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H, 와 그라노? 뭔 일 있나?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라." 


 O선배도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후배가, 갑자기 전활 걸어서는 엉엉 울면서 전화를 하니 말이다. 흥분되고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꺼낸 말은. 

 

"행님, 도저히… 도저히 못하겠어요… 못 버티겠어요." 


 선배라는 말보다 형님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내게 이 회사를 추천해준 O선배는, 회사 안에서 선배이기 이전에 친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교환학생 시절 알게 된 O선배, 아니 O형님은 늘 커다란 나무와도 같았다. 한 살 차이긴 했지만 경험도 많았고 하는 일마다 듬직하고 멋져 보였다. 중국어를 공부하며 방향성을 잃어갈 때에도, 취업 준비 시절 여러 기업에 번번이 낙방하며 힘들어할 때에도, 늘 격려해주며 힘을 주던 멘토였다. 입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본인도 힘들면서 내가 버거워하는 일이 있으면 같이 나눠서 하려 했고, 연차 한번 쓰는 것에도 미안해하던 선배였다.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직장선배. 그랬기에 나와 맞지 않고 힘든 직장생활에도 그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버틸 수 있는 힘을 모두 잃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말뿐이었다.


"그동안 진짜 이겨내 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안 되겠어요… 시간 지나면 일도 적응되고 다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중국어도 잘할 줄 알았고. 근데, 계속 얘기한 것처럼 그냥 저랑 안 맞는 일 같아요. 안 맞는 옷,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계속 입고 있으려니까, 미치겠어요." 

"H, 다 안다. 힘들었제. 이제 내도 니한테 더 버티라고 말을 몬하겠다. 그냥 책임님한테 말씀드리고. 니도 버틸 만큼 버텼으니까, 다른 일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우리가 앞으로 더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여기 떠난다고 해서 관계가 안 좋아지는 거도 아니니까. 그냥 형으로서 얘기하면, 그만두는 게 맞는 거 같다. 말씀드리고 온나." 


 O선배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단, 그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과 마음에 더 공감해주었다. 통화를 마칠 때까지도 나는 격해진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여전히 울고 있었다. 누가 볼까 싶어서 흡연장 저 멀리 외진 곳에 숨어서, 그렇게 수 십 분을 울었다. 



    

 그 자리에서 큰 결심을 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 마침 J책임님과 마주쳤다. 


"왜? S가… 니 울었나?" 

"책임님… 그…"


 바보 같게도 또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왜 눈물이 먼저 나왔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그간 쌓여온 서러움, 힘듦, 버거움,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왔던 건가. 어쨌든 간신히 참아내고는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않고 바로 꺼냈다. 


 "도저히 못 버티겠어요. 그만둘게요." 


 책임님은 놀란 토끼눈을 하시고선, 누가 들을 새라 나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만한 회의실이 있나 여럿 둘러보았지만 모두 회의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결국 2층 복도 끝 계단 앞에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왜 또, 갑자기. 그만 울고. S가 뭐라 했나."

"아뇨. 그냥… 못 버티겠어요. 몇 달 전 선전에서 처음 퇴사한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한동안 괜찮았거든요? 그냥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도 더 열심히 하려고 했고, 중국어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제는 한계를 느껴서 도저히 못하겠어요."

"왜, 니 잘하고 있다 지금. 내가 진짜 파트리더라서 이런 얘기하는 게 아니라, 몇 살 위 형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해도 잘하고 있다, 진짜로." 

"다른 거 다 떠나서, 저랑은 진짜 안 맞는 일 같아요. 아시다시피 저는 되게 내향적인 사람인데 사람 대 사람으로 일해야 되는 것도 힘들고, 그렇다고 O선배처럼 중국어를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에요." 

"사람 대하는 일이 힘들긴 하지. 근데 툭 까놓고 얘기하면 어딜 가나 사람이랑 부딪치면서 일한다. 그거 잘 생각하고. 일적인 부분으로만 얘기하면, H 니가 다른 동기들이랑 비교해도 유독 성장하는 게 막 느껴지는데, 니는 모르겠나? 우리 팀 J나 QC팀 P랑만 비교해도 잘하고 있다고." 


 그동안 책임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묵혀 놨던 말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하지만 첫 번째 퇴사 선언 때와 같이, 책임님은 이번에도 역시 나를 회사에 잡아두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격려와 회유를 번갈아 가며 일장연설을 하셨다. 그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게다가 이 격려와 회유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책임님의 신체 반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퇴사 선언 때와는 달리, 말씀하실 때마다 내 눈을 쳐다보지 않으시고 허공으로 눈길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행동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행동' 중 하나에 해당했다. 내게 했던 격려의 말들이 진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J책임님 본인만 아시는 거였겠지만, 당시 퇴사를 간절하게 원하는 내게 그 행동은 거짓처럼 보였다.  

 

"뭐 다 차치하고, 나는 니가 회사에 남아서 나랑 같이 일해줬으면 한다. 오늘 좀 충동적으로 S랑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하는 얘기야. 그래도 그만두고 싶나?" 

"……" 


 그만두고 싶냐는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 더 얘기한다고 해도 쉽게 놓아주실 것 같지 않았다. 어디 앉지도 못한 채 거의 30분을 서서 퇴사 얘기만 하니 나나 책임님이나 모두 지친 상태였고, 나 또한 어린애 마냥 계속 징징 댈 수도 없었던 노릇이라 일단 한 발짝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일단 팀장님한테 말씀드릴 텐데, 주말에 좀 쉬면서 생각해보고. 월요일날 다시 얘기해보자. 지금은 퇴사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일 다 손 놓고, 내가 알아서 처리하께."


 얘기를 마친 나와 책임님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폭풍 같던 통화의 여파로 내 자리는 엉망진창이었고, 휴대폰에는 S로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 넘었다. 책임님은 업무에선 손을 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 없었다. O선배가 연차로 자리를 비운 사이 대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았기 때문. 나는 퇴근 전까지 그 일들을 겨우겨우 처리해나갔다. 그렇게 악몽과도 같았던 금요일도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고, 내 두 번째 퇴사 선언도 그렇게 끝이 났다.



이전 13화 성장한 내 모습을 발견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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