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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본쓰 Aug 31. 2020

아니, 뭐 하자는 거야? J책임 데려와요!

(10) 처음으로 제대로 욕먹었던 그날.

 신입사원 시절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몇 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인생 실수를 했던 신입사원 환영회 에피소드나, 이야기 초반에 나왔던 파워블로거 에피소드, 국내 출장 등등.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쉬이 잊기 힘든 에피소드는 P책임님과의 트러블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트러블이라고 하기 뭐할 정도로 일방적인 관계(일방적으로 욕을 먹는 입장)였지만, 훗날 그가 책임에서 팀장으로 진급된 이후엔 갈등이 격화되었고, 결국 그와 나의 관계는 사내에서도 알아주는 견원지간이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다시 신입사원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입사 후 처음으로 제대로 욕을 먹은 날도 그와의 첫 대면에서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그는 모든 이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해왔던 사람이다. 아, 정정하자. 자신보다 직급이 낮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게는 왜 그리 잘 보이려 애를 쓰는지.) 사실 그를 처음 대면하기 전, 우리 팀뿐만 아니라 타 부서 동료들에게서도 그에 대한 불평을 들은 적이 있었다.


 "H 씨, 오늘 라벨 수정하러 PI팀(전산팀) 갔는데 빠꾸 먹었어요."

 "엥? 왜요? 오늘 오후 안으로 고객한테 에비던스 이미지(라벨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는 예시 사진) 보내주기로 했는데."

 "아, 몰라요. 라벨 담당자 찾아갔는데, 옆에 P책임님이 라벨 포맷 확실히 결정되면 가지고 오라 그래서 욕 오지게 먹고, 사무실에서 쫓겨났어요."

 "아… 그래요? 쫓겨나기 까지야… P책임님 빡세요?"

 "아직 안 가봤어요? 어휴, 개 빡세요. 나중에 아마 알게 될 걸요?"


 옆 부서 소속 Y사원은 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동료였다. 특히 라벨 업무 관련해서 대부분의 요청사항은 모두 Y사원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Y사원은 다시 전산팀의 라벨 담당자에게 요청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정리하자면, 고객사 라벨 수정 요청→요청사항 접수 및 내부 공유(품질팀)→검토 및 적용 요청(Y사원)→최종 검토 및 전산 적용(전산팀) 이런 구조였다. 그런데, P책임님 때문에 아무 성과 없이 Y사원이 사무실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P책임님은 라벨 담당자는 아니었지만, 느낌에 뭔가 딴지를 거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내가 처음 욕을 제대로 먹었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책임님, H사에서 출하 성적서 전산화 진척상황 물어보던데, 전산팀에서 아직 회신이 없더라구요. 회의실 하나 잡을까요?"

"C책임님 찾아가서 확인해보고 바로 회신해줘."

"아, 네네. 알겠습니다."

 

 고객사 중 한 곳인, H사와의 비즈를 막 시작했을 때였다. 양사가 비즈를 시작하게 되면서 양사 간 전산 구축도 필요했는데, 출하성적서 전산화 업무도 이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내가 해당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전산팀의 협조가 절실했다. 전화나 메신저보다는 직접 찾아가서 하나하나 말씀드리고 설명을 듣는 것이 예의를 갖추기나 이해하기에 나았다고 생각한 나는, 항상 들고 다니는 업무용 다이어리와 검정색 볼펜 한 자루를 챙기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2층 기나긴 복도를 지나 맨 끝자락에 위치한 전산팀 사무실. 이날 이후로 그곳은 늘 공포의 사무실이 되었다.

 

"C책임님, 안녕하세요. QA팀 H사원이라고 합니다."


 전산 담당자인 C책임님 자리를 찾아가 그 옆에 쭈뼛쭈뼛 서서 인사를 드렸다. C책임님은 여자분이셨는데, 첫인상이 굉장히 차가웠다. 모니터엔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했는데, 아마도 코딩에 필요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었다.


"저요? 저 찾아오셨어요?"

"네, 책임님. 바쁘신데 죄송한데, 그… H사 출하 성적서 전산화 관련해서…"

"지금 좀 바쁜데… 일단 말씀하세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는 C책임님의 대응에 순간 당황했지만, 반응이 어떠하든 나는 진척상황을 확인하고 고객사에 회신해야 했다. 그전에 파트리더인 J책임님께도 컨펌을 받아야 했고. 그랬기에 당황함과 무례함을 무릅쓰고 여쭤보았다. 그렇게 C책임님께 배경 상황과 고객사 요청사항에 대해 설명드리던 중, 저 멀리 파티션 너머로 P책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C책임님. 왜요? 어떤 거 때문에?"

"아… H씨가 출하 성적서 전산화 상황 물어봐서요."

"아, 잘 왔어요. H씨, 일로 잠깐 와봐요."


 격조 있게 'H씨'라 호칭을 붙여주었지만, 그 안에 담긴 목소리며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P책임님, 안녕하세요. C책임님께는 먼저 말씀드렸는데…"

"어디 문제 있어요?"

"그… 현재 진척상황에 대해서 고객사 쪽에서 문의해와서요. 그래서 C책임님한테…"

"아니, 안 그래도 얘기할라 했는데 이거 포맷도 안 정해진 거를 우리한테 넘겨주고 셋업 해달라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네?"


 갑작스러운 그의 윽박에 나는 배때기 걷어 차인 놈 마냥 깨갱했다. 사실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나는 그 업무를 막 시작한 병아리 사원이었고 고객사가 묻는 질문에 답변해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 이전에 업무를 담당하던 이는 O선배였지만 부재중이었고 J책임님은 현재 진척도만 확인 해오라는 간단한 오더만을 남겼다. 뒷배경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나, 나는 사원 직급이었고 P는 책임 직급. 연차로만 따져도 무려 10년 이상 차이 났으니, 나는 그 어떤 말도 답할 수 없었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주홍빛 가득하게 변해갔고, 극도의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났다.


"아니, 왜 대답을 안 해?"

"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한 게 아니고 이렇게 던져주기만 하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주냐고. 그래, 안 그래?"

"죄송합니다…"

 

 전후 사정 안 따지고 바로 전산팀 찾아가서 물어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내게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던 J책임님과 인수인계 없이 부재중이었던 O선배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순간엔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짓고 가야겠다는 생각뿐.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던 중, 그는 분이 안 풀렸는지 아니면 나 같은 사원이랑 얘기해서 뭐하겠냐는 생각이었는지, 이윽고 버럭 했다. 

 

"아이, 참. 답답하네. 아니, 뭐 하자는 거야? J책임 데려와요!"




 아무 성과 없이 안 좋은 소리만 듣고 전산팀 사무실을 빠져나오면서 급격한 피로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동시에 억울함과 함께 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했다. '아니, 이게 그렇게 버럭 할 일인가? Y사원 말이 맞네, 약간 또라이 같기도 하고.' 다시 사무실로 되돌아온 나는 대역죄인처럼 J책임님 자리 앞으로 가서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책임님… 그… 출하 성적서 물어보러 갔는데요… P책임님이 책임님 모시고 오라고…"

"엥? 왜? C책임님한테 물어보라니까."

"아, 그게. C책임님한테 여쭤보긴 했는데, 중간에 P책임님이…"

"아이, 알았어."


 J책임님과 나는 빈 회의실로 가서는 P책임님과 마주했다. 앞의 상황과는 맞지 않게, 아주 이상하게도 일은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회사에서 더 오랜 기간 일한 P책임님이 J책임님에게 다그치는 모습은 있었지만, 나에게 대할 때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그 자리에서 또다시 나에게 성난 얼굴과 날카로운 말로 버럭했고, 나는 또 한 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며 어찌할 바를 모르긴 했다. 어느 신입사원이든, 한참 윗사람에게 욕먹을 때는 당황스럽고 할 말이 없을 터. 생각보다 짧은 회의 끝에, 결국 출하 성적서 포맷을 다시 검토해서 전산팀에 넘겨주는 걸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H, 놀랐나?"

"아, 예…"

"저 사람 원래 저렇다. 회사에서 별로 좋아하는 사람 없어. 백날 저래 싫은 말만 해카니, 좋아할 리가 있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J책임님은 나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주려 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J책임님은 늘 인간적으로 나를 대해주려 노력하신 것 같다. 만약 P책임님 같은 사람을 파트리더로 만났다면… 어후,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  

 그렇게 입사 후 처음으로 제대로 욕먹었던 그날은 전산팀에서의 신고식이라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리기로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멘탈 건강에 훨씬 이득일 것 같아서. 물론 지금까지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는 걸 보면, 분명 충격에 가까웠던 기억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후로 내가 맡은 업무의 7할은 전산 관련 업무였고, 그와 부딪히지 않을 수는 없던 노릇. 그 뒤로도 몇 차례 그와의 충돌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또 적어보고자 한다.

 여담으로, 내가 처음 찾아간 C책임님과 전산팀 내 또 다른 여자 직원 한 분은 몇 달 뒤 개인적인 사정으로 퇴사를 하셨다. 뭐 퇴사 사유야 개인적인 사정이라고는 하지만, 내 뇌피셜과 여러 동료들로부터 들려오는 썰로는 P책임의 업무 스타일에 질려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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