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외출장을 앞두고 내린 퇴사 결심.
입사한 지 7개월을 갓 넘겼을 무렵. 업무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 갔고, 심지어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게 될 정도였다. 퇴사에 대한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오던 중이었다. 결정만 하지 못한 채. 그러던 와중에 예상보다 이른 해외출장 계획이 잡혔다. 팀장님과 책임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느 정도 업무에 녹아들었다고 판단하셨는지, 하루는 나를 자리로 부르셨다.
"H, J책임. 일로 와봐."
"네, 팀장님."
"H, 중국 비자 신청해놨지?"
"아, 네. 비자 받아놔서 준비는 돼있습니다."
"월말에 S사 갔다 오고, 다음 달 초엔 N사 갔다 와라."
"심천이랑 상해요?"
"어어. 고객사 담당자한테 미리 얘기해서 미팅 날짜 확정해놓고, 항공권이랑 호텔 예약하고."
"네, 알겠습니다."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못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멘탈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인 데다, 전화통화도 제대로 못하는데 회의는 어떻게 주관할 것이며, 고객사 담당자와 식사도 해야 할 텐데 얘기는 어떻게 주도할 것이며…. 크고 작은 걱정들이 하나하나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불안감과 걱정은 쉽사리 사라지질 않았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머리가 하얘져서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질 못했다.
"선배, 커피 한 잔."
너무 걱정되고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결국 사수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금 이대로는 절대 출장을 갈 수 없다고. 가서 쪽만 당하고 올 거라고.
"행님, 이번 출장이요… 도저히 안 될 거 같은데…."
"안 되겠나? 뭐 땜에?"
"일단 중국어가 안돼요. 아시잖아요, 통화나 겨우겨우 하고 있는데, 출장이라뇨…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지금 가면 진짜 개쪽만 당하고 올 텐데."
"괜찮다. 나도 입사하고 몇 달 안 있다가 출장 갔었는데. 그냥 가서 고객사 담당자 인사하는 거고, 회의는 책임님 하는 말만 그냥 통역하면 된다. 뭐 무거운 회의도 아니고, 품질 이슈 있어서 가는 거도 아니다이가."
"아… 그래도 좀…. 멘탈 박살날 것 같은데."
"음… 그면 일단 내가 팀장님한테 말씀드려보께. 정 안되면 내가 대신 갔다 오면 되지."
고객CS 업무를 하면서 언젠간 한번 부딪혀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로 지쳐있던 내가 갈 만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No'. 가야 했다. 그러나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긴 했다. 팀장님이나 책임님이나 두 분 모두, 가볍게 가는 해외출장이니 부담감 갖지 말라고 하셨고 회의자료 준비도 도와줄 터이니 괜찮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이렇게 좋은 상사들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해외출장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마침내 퇴사 결심을 했다.
짧은 직장생활 내내 외국인 고객을 맞이하고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소통하는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고, 나는 그 벽을 넘기 위해 나름대로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벽을 넘는 데에 번번이 실패했고, 이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요 고객사 중 한 곳이었던 F사의 담당자가 내방을 했던 날. 고객사 내방 일정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식사 대접 자리. 숱하게 많았던 식사 대접 자리였지만, 중국어 한 마디 못하는 상사를 모시고, 회사 입장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외국인 고객을 상대로 식사하기란 매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어 장벽도 큰 문제였지만, 그 외적인 요소들 역시 많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딱딱한 분위기를 풀 만한 농담이라던가, 고객사를 기분 좋게 하는 사탕 발린 말이라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국내외 이슈들에 대해서 등등. 사수였던 O선배는 늘 수월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해냈지만,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H, 고객이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내 화장실 좀 갖다오께."
"아, 넵. O선배는요?"
"기숙사에 차 대고 온단다."
그렇게 나와 고객사 담당자, 둘만 남은 테이블. 어색하게 있기 뭐해서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초면도 아니었고, 업무 하면서 그렇게 많이 대화를 했었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간은 흘러만 갔다.
"얘기 좀 했나?"
"아, 예… 뭐."
자리로 돌아온 책임님은 O선배가 올 때까지 고객이 뻘쭘하지 않게 어떤 말이든지 뱉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방금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딱히 떠오르는 말도 없었고, 있다손 쳐도 제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100% 정확하게 알아들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고. 다행히 O선배는 금방 우리가 있는 식당으로 찾아왔고 그 뒤로는… 아주 원만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벽을, 그 문턱을 이번에도 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H, 기분이 안 좋아 뵈는데? 어디 아프나?"
"아, 아뇨. 속이 별로 안 좋아서…."
이날 식사자리를 파할 때까지 나는 입을 거의 떼지 않았다. 간간이 오가는 대화에 영혼 없는 웃음만 지었고, 그저 고기 굽는 일에만 집중했다. 머릿속에선 앞으로의 내 거취에 대해서 고민만 하고 있었을 뿐. 그리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결심했다. 퇴사하기로.
사실 이날이 기폭제가 되었을 뿐, 입사 몇 달 뒤부터 퇴사는 줄곧 내 목표가 되었다.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꿈꾸는,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취업 준비를 할 때의 그 간절함, 입사 직후의 열정과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곳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었다.
'나는 애초에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늘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잖아. 더 능력 좋고 우수한 인재가 오는 게 맞는 거야. 나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가면 되는 거고. 그래, 퇴사하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온통 퇴사 생각뿐이었고, 이미 내 결심을 되돌리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온 스트레스는 어느새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고, 이날 느꼈던 패배감과 좌절감을 매일 느끼며 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민 끝에 퇴사 선언은 며칠 뒤 예정된 첫 해외출장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전에 결정했다면 이 해외출장도 가지 않았겠지만, 나 스스로도 너무 갑작스러웠던 퇴사 결심을 고려해서 '이번만 딱 눈 감고 갔다 오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S사 담당자분이 한국인이라 크게 부담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었고.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