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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an 07. 2018

사람에게 추억이란 무엇인가

영화 <원더풀 라이프> , 고레에다 히로카즈

퇴근 후 헬스장에서 1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밖을 나서면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서점이 하나 있다. 마음이 허하거나 책이 고픈 날이면 나도 모르게 서점의 힘을 잠시 빌린다. 내가 찾는 책이 있든 없든 일단 서점 한 바퀴를 돌고 그 날의 서점 분위기를 살핀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패턴으로 도는데도 항상 돌 때마다 기분이 색다르다. 작년 연말쯤 언제나 그렇듯 돌다가,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앞이었다.




자신의 영화와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전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TV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먼저 경력을 쌓았다. 그래서 그가 쌓아온 필모그래피를 보면 다큐멘터리적 요소들이 물씬 풍긴다. 첫 장편 영화 <환상의 빛> (1995년)으로부터 3년 뒤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 영화가 내가 소개할 영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죽은 이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림보'라는 곳에서 생전 본인에게 가장 소중했던 추억 하나를 고른다. 선정된 추억은 림보 직원이 영화로 만들고, 죽은 이들은 그 영상을 보며 천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소중한 추억을 하나만 골라주세요.



어린 학생은 질문을 받자마자 디즈니랜드에서 신나게 놀았던 추억을 고르기도 하고, 중년의 남성은 불행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추억 따위는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죽었다는 이유로 이 곳에 모인 많은 이들은 이 질문을 통해 저마다 다른 삶의 무게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또한 '나는 어떤 순간을 골라야 할까?'라는 질문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 영화의 매력은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만 멈추지 않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의 빨간 구두에 대한 경험을 소중한 추억으로 말하는 이 할머니(타타라 키미코)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연기하는 꼬마 아이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 인상 깊을 것이다. 할머니의 표정은 연출된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본 듯한 착각을 들기도 한다.


사실 그 착각이 맞다. 이 영화는 전문 배우가 아닌 대부분 영화 출연 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 배우를 썼다. 이 할머니 또한 본인의 실제 경험을 영화 속에서 이야기했고 위 장면은 원래 예정된 부분도 아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대역을 하게 될 소녀가 빨간 구두와 치마를 차려입고 나오는 걸 보자, 흥분한 나머지 소녀에게 다가가 직접 어린 시절 추었던 춤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예정된 연출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감독들은 기껏해야 메이킹 필름 정도에 담았겠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런 에피소드일수록 영화에 꼭 담아낸다. 그런 습성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커온 자신의 자기표현 욕구에서 기반된다. (나는 이렇게 리얼티리를 담은 장면이 너무 좋았다.)



추억을 쉽게 고르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좀처럼 고르지 못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와타나베 씨는 자신의 삶이 1년에 1개씩 담긴 70개의 비디오테이프를 차례대로 보면서 어떤 추억을 골라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면서 '나도 저곳에 가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평범한 삶, 중매로 이어온 40년의 결혼생활에서 그가 고른 추억은 처음으로 아내와 극장에 갔던 날, 근처 공원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그렇게 와타나베 씨는 아내와 보낸 소소한 시간의 추억을 안고 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남은 모치츠키는 숙소에서 와타나베가 남긴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와타나베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모치츠키가 아내의 약혼자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치츠키의 동료 시오리는 보관소에 있는 오랜 필름을 뒤져 그녀(교코)가 선택한 추억 영상을 찾아내고,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직접 확인한다.



그녀가 선택했던 추억은 남편(와타나베)과의 추억이 아닌 모치츠키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 벤치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행복한 기억 속에 본인이 있다는 것, 그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일까?


50년 넘게 림보에서 추억을 선택하지 못한 모치츠키는 이제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를 흠모하고 있던 시오리는 그가 떠날까 봐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이제 떠날 것임을 예감하자 옥상에서 눈을 걷어차며 스스로에게 화를 낸다. 그와 함께한 시간을 선택한 이의 추억을 찾아준 것도 바로 그녀였으니까. 추억을 선택하면, 이 곳에서 있었던 좋았던 기억을 잃게 되니 선택하기 두렵다는 시오리의 말에 모치츠키는 "걱정하지 마, 내가 꼭 기억할게"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모치츠키는 예외를 인정해준 동료들 앞에서 본인이 선택한 추억을 촬영하게 된다. 그는 의자에 앉아 관객을 향해 무엇인가 골똘히 쳐다보고 있다. 과연 그는 그녀(교코)와 같은 마지막 추억을 골랐을까?



그는 본인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동료들을 마지막 추억으로 골랐다. 모치츠키는 누군가의 추억을 영화로 재현해주는 동료들의 모습을 천국으로 가져가는 단 하나의 기억으로 선택한 셈이다.


(대사 없이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 장면이 왠지 모르게 슬프게 다가온다.)



영화는 CGV 용산에서 더스페셜 패키지로 관람했다. 관람 후에는 림보 노트, 원더풀 라이프 장면이 그려진 캘린더 엽서와 비디오테이프 케이스 등을 받았다. 원더풀 라이프의 추억들을 비디오테이프 케이스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에게 추억이란 무엇인가


나이가 들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들이 있다. 책 <어린 왕자>가 그랬고,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 그랬다.  극장을 나서면서 '10년 후에 보면 지금보다 더 짙은 여운이 남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가 끝나고 우리의 삶에서 각자의 영화가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가진 감독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 또한 나와 다르지 않게 '나 같으면 어떤 추억을 고를까?라는 질문을 가진 채 나왔을 것이다.


모치츠키는 와타나베에게 그의 삶이 담긴 70개의 비디오를 건네면서 이것은 기록일 뿐입니다. 추억을 선택할 때는 기록이 아닌 와타나베 씨 본인의 기억을 믿으라는 말을 내뱉는다. 우리는 기억은 왜곡된다고 믿고 기록을 중시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만큼은 왜곡된 기억일지라도 본인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군가에게는 그저 흘러간 찰나의 순간이 또 다른 이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슴 한 켠에 자리 잡는다. 추억의 깊이나 크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고 감독은 원더풀 라이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소중한 추억을 하나만 골라달라는 감독의 질문에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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