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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Aug 08. 2018

열정은 어떻게 전염되는가

왜 나는 안 되고 그들은 되는 걸까?

연초에 다이어리는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그렇지만 여전히 끝까지 쓰는 사람은 드물다. 이뿐이랴, 책을 구입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 책에 대한 호기심보다 현재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책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구입하고, 집안이 엉망인 사람들은 책 <심플하게 산다>를 구입한다. 다이어리를 구매할 때처럼 책을 사면 뭔가 바뀔 것 같지만 반복되는 구입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글쎄다.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다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엉망인 집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비슷하면서 이름만 다른 새로 나온 책을 구입한다. 물론 연초가 되면 다시 다이어리도 구입하고.


 어떤 사람들은 출근 전이나 퇴근 후 헬스장에 다니며, 몸짱은 아닐지라도 겨우내 불어난 체중을 감량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출퇴근 길에 틈틈이 독서를 하고 짬짬이 글을 쓰다가 본인 이름 석자가 적혀있는 책을 내기도 한다. 


직장인이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새로운 것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1년 내내 다이어리를 통해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도 있고, 책을 통해 인생이 바뀐 사람도 종종 보인다. 결심은 똑같이 하는데 왜 나는 안되고 그들은 되는 걸까?



영화 <라라 랜드>에서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사랑을 위해 꿈을 포기한다. 반면 미아(엠마 스톤)는 사랑을 통해 꿈을 되찾아간다. 현실을 택한 세바스찬에게 미아는 꿈을 포기하지 말자고 한다. 


스물아홉 내가 넘어야 할 것은 
승진, 결혼 혹은 임신, 출산 중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그것들이 삶의 과업이라 생각했다.
허나, 내가 정작 넘어야 할 것은
겨울 아침, 이불 밖으로 발걸음을 떼는 일이었다.
책 <찌질한 인간, 김경희>

꿈을 꾸는 순간 우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대가가 따른다. 큰 꿈일수록 그 대가의 무게는 가혹하기만 하다. 차라리 큰 꿈을 꾸는 대가가 너무 커서 좌절한다면 납득이라도 되지만, 이불 밖으로 발걸음을 떼는 일처럼 매일마다 마주하는 작은 것들에서부터 무너진다. 작은 것에서부터 연달아 무너지는 자신을 자책하고, 이미 꿈을 이뤄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저 사람들은 이런 작은 것들은 애초에 걸림돌도 안 되겠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어떤 날은 지나다니는 차가 없어도 신호를 지키고, 어떤 날은 무단횡단을 한다. 언제는 신호를 지키고, 언제는 지키지 않는다는 기준이 딱히 없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무단 횡단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만큼은 기준이 엄격하다. 


라라 랜드의 미아처럼 꿈꾸는 이들이 묻는다.


 우린 어디쯤 어딨는 거지? 


재즈에 대한 세바스찬의 열정은 미아가 재즈를 좋아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다른 방향으로도 전염되어 미아는 좌절했던 꿈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세바스찬처럼 우리 주변에도 열정을 전염시키는 이들이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독서나 운동을 하고 출근하는 사람, 퇴근 후 휴식이나 술자리와 같은 유혹을 뿌리치고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열정을 얻는다. 그렇지만 그 열정은 얼마 가지 않아 소멸되어 지속되지 못한다.  


다시 미아의 질문에 현실을 택한 세바스찬이 답한다.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우리 인생도 항상 흘러가는 대로 쌓여갔다. 누구든지 작은 강에서 망망대해와 같은 바다로 나아가길 원하지만 흘러가는 대로만 가다 보면 어떤 목적지에 닿을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특별한 기준 없이 어떤 날에만 무단횡단을 하는 것처럼 일관성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기준이 우리를 끊임없이 지배한다.


불청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꿈만 갖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확인한다. 항상 비슷한 자리에 있는 것 같고, 이미 꿈을 이룬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좌절하고 넘어진다. 그러나 꿈은 결국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의 몫이지, 그 자리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불청객이 있다. 일관성이 없는 기준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퇴근 후 술 마시러 가자는 동료일 수도 있다. 아침에는 퇴근 후 헬스장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퇴근 후 갑자기 가기 싫어 변한 마음도 인생의 불청객이 될 수도 있다. 


불청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불청객이 방문할 때마다 매번 휩쓸리고 일상이 쉽게 무너져 그것을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항상 무너진 자신을 자책한다. 그러면서 불청객 존재 자체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 다른 사람은 불청객이 오더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은 꼭 한다. 뛰기를 멈추고 잠시 걸으면서 계속 나아가는데 페이스를 잃지 않도록 신경 쓴다. 불청객은 언제든 찾아오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존재 자체에 스트레스를 느끼기보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떠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던 것에 집중한다. 


전자는 불청객 때문에 무너지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왜 무너졌는지 이유를 잊어버리고, 이전에 무너졌던 지점에서 다시 무너진다.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불청객은 슬럼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열정은 어떻게 전염이 되는가 

우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이 착각 때문에 '왜 나는 안 되고 그들은 되는 걸까?'라는 편협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될 때가 있고, 그들이 안 될 때가 분명히 있는데 말이다. 


작은 것도 누구에게나 걸림돌이 되고, 어떤 사람이든지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지만 결국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걸림돌에 직면하더라도 넘어져서 울기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이런 굳은 믿음에서 뿜어져 나온다. 아이러니하게 슬럼프가 오고 난 직후에 결과가 좋을 때가 많다. 이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열정을 받는 것이다. 정작 그전에 슬럼프가 왔는지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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