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오롯이 영화를 위한 부산 여행을 떠나다.
영화제는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올해에만 벌써 세 번째 영화제를 다녀왔다. 7월에 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에 다녀왔고, 9월에는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이하 SESIFF), 10월에는 23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에 다녀왔다.
BIFAN에서는 폐막하는 7월 22일에 단편영화 2편을 관람했다. 1편에 단편영화가 4~6개 정도 줄줄이 상영된다. 모든 작품이 괜찮다고 말할 순 없지만, 종종 괜찮은 작품들이 레이더에 들어왔다. 단편선11에 있던 영화 <추억을 팝니다>는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줄거리를 줄줄 꿰고 있다.
다음은 SESIFF였다. 총 3편을 관람했다. 영화제 타이틀을 보면 알다시피, 역시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들로 구성된 작품들이다. 정말 짧은 건 1분 내외로 구성된다.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이 단편 영화의 장점이다. 장편에서는 과감하게 시도하더라도, 뒷수습까지 하려면 완벽한 서사가 필요하다. 만약 일반 대중이 그 서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과감한 시도만 남고 영화는 남지 않는다. 반면 단편은 짧은 시간만큼 '강렬함'이다. 강렬함이 보이는 작품들이 이번 SESIFF에서 종종 보였다. 특히 학생이 졸업작품으로 출품한 작품도 있었는데,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로 데뷔한 윤종빈 감독이 떠올랐다. GV 때 앞으로 계속 영화를 업으로 삼겠다는 다짐에 응원을 실어주고 싶다.
앞선 두 번의 영화제는 단편영화로 구성된 작품들을 주로 관람했다. BIFF에서는 10월 7일부터 8일까지 양일간 장편영화 7편을 관람했다. 영화 <영혼의 사투>를 제외하고는 영화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모두 센텀시티에 몰려있어서 영화를 관람하기 용이했다. 어떤 영화가 좋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영화 <할로윈>과 <시스터스 브라더스>를 답하겠지만, 어떤 영화가 별로였냐고 묻는다면 '없다'라고 답할 것 같다.
10월 7일 - 영화 <할로윈>, <영혼의 사투>, <블랙 47>
영화 <할로윈>
동서대학교 소향씨어터 신한카드홀에서 가장 먼저 관람한 영화 <할로윈>은 10월 31일에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BIFF에서 관람한 7편의 영화 중 유일하게 포스터에 한글이 삽입되어 있다. 깜짝 놀래키는게 싫어서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언젠가부터 정신을 차리면 극장에서 공포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요즘 공포 영화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증폭한다.
할로윈 시리즈는 1978년에 제작된 1편을 시작으로 2002년에 8편까지 제작되었다. 이번에 개봉하는 블룸하우스의 영화 <할로윈>은 2~8편을 과감히 무시하고, 1편의 스토리에서 40년이 지난 시점으로 이야기를 잇는다. 어쩌면 기존 팬들에게는 대단히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인데, 영화를 관람하니 블룸하우스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는 영화 <할로윈>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는 있어도, 실망하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잘 만들었다.
블룸 하우스의 수장 제이슨 블룸은 이번 23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내한했다. 이 날 영화가 끝나고 제이슨 블룸이 나와서 씨네21 주성철 편집장의 진행 하에 GV가 진행되었다.
영화 <영혼의 사투>
두 번째로 관람한 영화는 <영혼의 사투>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중에 유일하게 센텀시티가 아닌 장산역에 위치한 극장이다. 본인이 살기 위해서 계속 다른 사람을 살인하고, 그 몸에 기생해야 한다는 설정을 가진 영화다.
역시 감독님과 프로듀서님이 자리를 빛내주셨다. 계속 다른 사람을 살인하고, 그 몸에 기생해야 한다는 설정이 다소 의미심장하다 보니 질문이 줄줄이 쏟아졌다. 집 근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GV가 있을 땐 내가 민망할 정도로 질문하는 분이 적었는데 영화제 GV에서는 역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랄까 봐, 질문 수준도 높고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국내 영화들은 GV할 때 참석한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참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는데, 블룸하우스 수장 제이슨 블룸도 그렇고, 영화 <영혼의 사투> PD님도 주머니에 손 넣고 자유롭게 GV에 응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영화 <블랙 47>
영화 <블랙47>은 1847년 영국에 의해 무참히 억압받고 있는 아일랜드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다. 영화 <매트릭스>에 스미스 요원 역을 소화한 휴고 위빙과 영화 <킬링 디어>에서 마틴 역을 맡은 배리 키오건이 출연했다. 하루에 세 번째로 관람한 영화다 보니 몸이 녹초가 되어서 조금씩 졸았지만,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모습이 마치 한일관계가 떠오를 정도로 잘 그려냈다. 약 170년 전이다 보니 총을 쏘더라도 높은 습도 탓에 계속 불발되는 모습을 상당히 잘 그려냈다.
영화 <비전>
영화 <비전>은 1997년 영화 <수자쿠>를 통해 칸 영화제 황금 촬영상을 최연소로 수상한 가와세 나오미가 연출했다. 황금 촬영상을 수상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영화 <비전>은 프랑스 저널리스트 잔느가 997년에 한 번씩 피는 희귀한 약초 '비전'을 찾아 일본의 어느 산골 마을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워낙 은유적으로 다룬 내용이 많아 영화는 다소 어렵게 다가왔지만, 영화 속에서 자연을 그려내는 그녀의 방식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속으로 비치는 햇살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영화 <만토>
영화 <만토>는 인도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이 탄생하던 혼란의 시기에 살아가던 작가 만토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인도에서 4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로도 활동했던 난디타 다스 감독의 작품이다. 만토는 독립하기 전 인도에서 왕성하게 글을 썼지만, 파키스탄에서 자신이 쓴 글이 계속 억압받자, 그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독립은 좋은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좋은 것이지 개인에게까지 전염되지 못했다.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불안정한 시대를 지탱하고 있는 대만이라는 국가의 비극이 한 개인에게 빠른 시간 내에 전염되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면, 영화 <만토>에서는 반대로 국가의 행복이 개인에게까지 전염되지 못한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영화 <운수 좋은 날>
샘 해밍턴과 닮은 아르민(알렉산더 섹선)은 일이 필요하다. 면접이 있는 날 아침에 면접장을 가다가, 뺑소니 당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119에 신고한 그의 옳은 행동이 결국 면접장에 늦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채용되었고, 마틴 터크 감독은 옳은 선택이 꼭 옳은 결과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모습을 영화 <운수 좋은 날>에서 아르민을 통해 계속 보여주고 있다. 정의는 꼭 필요한 신념이지만, 정의가 밥까지 먹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시스터스 브라더스>
영화 <시스터스 브라더스>는 감독과 출연하는 배우부터 쟁쟁하다. 영화를 연출한 자크 오디아드는 영화 <디판>을 통해 201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영화에는 제이크 질렌할, 호아킨 피닉스, 존 C. 라일리 등이 출연한다. 이 영화를 관람하기 며칠 전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관람하고도 영화 <시스터스 브라더스>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정말 카멜레온 같은 배우다. 워낙 서부 영화들이 많이 제작된 탓에 다소 진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뒤로하고 영화는 관객을 웃고 울리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쌓아간다. 영화 <할로윈>과 더불어 국내에 개봉한다면 꼭 N차 대열에 합류할 영화다.
SRT를 타고 수서와 부산을 오고갔다. 마침 11번가에서 부산국제영화제 교통편을 판매하고 있어서 저렴하게 구입했다. 부산행 열차는 영화 예매권 1장이 포함되어 있고, 수서행 열차에는 스타벅스 기프티콘 1장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격까지 제하면 교통편은 왕복 6만원대로 정말 저렴하게 잘 다녀왔다. 식비에서 가장 많은 지출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영화를 위한 여행(?)이다보니 생각보다 뭘 먹지 못했다. 메가박스와 CGV에서 먹었던 팝콘과 콜라는 VIP 쿠폰을 적극 활용해서 비용을 최소화했고, 8일에는 워낙 일정이 타이트한 탓에 식사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부산을 방문하면 재방문해도 좋을만큼 숙소는 저렴한 가격에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마침 조식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8일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식사를 하고 극장으로 향해서 연달아 4편을 관람했다.
영화 티켓은 예매권 프리오더를 통해서 장당 4,950원에 5장을 구입했고, SRT에 포함된 1장과 영화진흥위원회 무비 히어로즈에 선정되어 5장을 추가적으로 받았다. 티켓을 모두 쓰고 오고 싶었지만, 아직 3장 가량 남았다. 나중에 부산에 방문한다면 영화의 전당에서 쓰든,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은 티켓을 소진해야겠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떠났던 1박 2일 부산 여행에서 들었던 비용은 약 15만 7천원이다. 좀 더 일정을 늘릴까하다가 1박 2일로 다녀왔는데 너무너무 아쉽다. 다음에 영화제에 간다면 하루에 1~2편 정도 관람하고 일정을 좀 더 늘려서 여행과 영화를 적절히 섞어 부산에 가 볼 생각이다. 영화가 끝날 때마다, 열렬히 박수 치던 관객들의 모습이 여전히 인상 깊다.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내년에는 조금 더 다양한 영화제에 가보지 않을까. 영화제를 위한 여행도 참 매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