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 감독 추상미
1951년, 한국전쟁 중 북한은 고아 1,500명을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냈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북한과 동일한 노선을 걷던 동유럽의 국가들은 북한의 요청에 한국 전쟁의 고아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러시아,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동독, 폴란드 등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동유럽으로 이송된 전쟁고아 중 특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이들이 향했던 폴란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 중 대부분이 머릿니가 있어서 먼저 삭발을 했고, 건강 검진을 받았다. 기생충이 있는 아이, 화상 입은 아이, 전쟁으로 인한 흔적이 얼굴에 깊게 배어있는 아이들까지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폴란드라는 낯선 땅에 와서 피부색이 다른 서양인을 처음 마주하고 느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폴란드 교사들은 아이들의 몸에서 발견된 기생충이 북한 지역에서만 발견되던 기생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양한 기생충의 종류만큼, 그 기생충이 발현하는 지역 또한 다양했다. 그 지역에는 남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아이들이 북한 아이들이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모인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건, 동유럽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건강을 회복하던 아이들은 1958년, 7월 31일에 전원 북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상처가 가득한 아이들을 보살펴주던 대부분의 폴란드 교사들은 20~30대 초반의 앳된 청년들이었다. 처음 아이들과 만났을 때 폴란드-한국어 사전 조차 없어서 대부분의 바디 랭귀지로 소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두려움만큼이나 답답함도 컸지만, 이내 주변 동네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폴란드어를 차근차근 익히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케어해주던 교사, 의사, 미용사, 요리사, 보모 등은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로 불렸고, 트라우마 가득한 아이들은 점차 회복하면서 웃음을 되찾았다. 그런데 교사들 중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가족을 잃거나, 아이들과 같은 고아 출신이 많았다. 어쩌면 이들이 어렸을 때 경험한 상처가 있어서 지금 아이들의 상처를 더욱 잘 이해하고 그래서 아이들이 그들에게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교사들은 가슴 아픈 작별을 한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은 탈북소녀 이송과 함께 영화 제작을 목적으로 폴란드에 방문하면서 그때 당시 아이들을 지극히 돌봐주었던 교사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북한으로 돌아가서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계속 폴란드로 가고 싶다는 아이들의 편지에 '이 편지가 나와 아이들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 볼 수 있어서 이렇게 주고받다간 큰일 나겠구나'라는 생각에 편지를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북한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살아는 있는지 그 소식이 너무 궁금해 아직도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북한 아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그 아이들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 어머니가 프와코비체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였던 전 폴란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사실을 처음 밝혀 정부에서 아이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먼저 관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