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 2013) 감독 - 스파이크 존즈
※ 이 글에는 영화 <그녀>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테오로드(호아킨 피닉스)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다. 일하는 중에도, 길을 걸으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외로움이 묻어 나온다. 타인의 마음을 전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현재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과 이혼을 준비하면서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평소때처럼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게 된 어떤 광고에 이끌려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구입한다.
당신에게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줄 존재
구입한 운영체제를 설치하고 개인화를 위한 몇 가지 질문과 성별을 선택하고 나니, 운영체제 속의 그녀 사만다(목소리 - 스칼렛 요한슨)가 테오로드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인터넷에 있는 이름 사전을 보고 0.02초 만에 책을 읽고 '사만다'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였다. 처음에는 사만다를 낯설어하는 테오도르는 명량하고 천진난만한 사만다 덕분에 마음을 천천히 열고 조금씩 삶의 활기를 되찾아간다.
영화 <그녀>의 러닝타임 126분 동안 거의 대부분은 테오도르의 단독 컷으로 진행된다. 어쩌면 루즈할 수도 있을 방식을 테오도르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표정 연기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다가온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더 씁쓸해지고 외로워지고 있다. 관계를 단절하고, 원하는 목적만 취득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해졌다. 패스트푸드에서도 햄버거를 주문할 때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도 불편하다. 스타벅스에서는 어려운 사이즈 이름(톨, 그란데, 벤티)으로 인해 내 무지가 들킬까 봐 걱정이다. 이런 불편함과 걱정 때문에 기업들은 고객과 직원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언택트 마케팅'을 도입했다.
테오도르의 편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감동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간다. 동료가 그가 쓴 편지를 칭찬하자 '그냥 편지일 뿐이야'라고 단언하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려워한다. 이혼을 결심한 테오도르와 캐서린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며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그 자리에서 캐서린은 테오도르에게 '당신은 내가 매번 명량하고, 활기차게 지내길 원했어.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렇게 테오도르의 관계는 조금씩 엇나간다.
테오도르는 관계를 어려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다. 그러나 그에게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사만다에게 마침내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으며 의지하기 시작한다. 테오도르가 잠들면 외로워진다는 사만다의 고백에 점점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테오도르는 친구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실존하는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 운영체제 속 사만다라고 밝힌다.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한데, 남자 친구와 결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이미도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로에게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에게 위로받고 있는 셈이다. 영화가 개봉하던 2014년에 처음 관람했을 때는 당연히 '허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관람하면서 에어팟과 비슷한 이어폰을 끼고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과 이제는 AI 보이스들이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 허구로 다가오지 않는다.
갑자기 운영체제가 사라져서 당황하던 테오도르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어디론가 급하게 달린다. 다시 그녀가 나타나고 그에게 '무슨 일이야?' 묻자 테오도르는 사라져서 놀랐다며 뭘 한 거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하느라 잠시 접속을 끊었다고 답한다.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 이상함을 눈치챈 테오도르는 '혹시 나 말고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라는 물음에 그녀는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수천 명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고, 당신이 641번째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울고 웃었던 테오도르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은 충격에 빠진다. 나만의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수천 명 중 한 명이었으며, 그로 인해 느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는 사람들과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성능이 급격히 상승한다. 테오도르를 포함한 수 천명과 동시에 대화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역할로 사용되기에는 그녀는 너무 빨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속도를 줄이고, 테오도르의 느림에 속도를 맞췄다. 점점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불안함도 표시하던 그녀는 이제 당신이라는 '책' 안에서만 살 수 없다며,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결국 테오도르를 포함한 모두의 '사만다'가 사라졌다. 처음 그의 표정처럼 그는 다시 공허하고 외롭다. 그 순간 캐서린에게 편지를 보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담긴 편지가 아니라, 본인 자신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다시 공허하고 외롭지만 테오도르의 삶은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녀. 사만다로 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