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모든 세상을 흑백으로 봐야 했다. 세월이 흘러 1980년, 드디어 컬러 TV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세상은 전두환 정권 아래 여전히 흑백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처럼 세상은 보고도 못 본 것처럼 행동해야 했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만 살 수 있었다. 그 시간, 소련(러시아)도 상황은 비슷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미국과 함께 연합국 소속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결정적으로 나치 독일을 무너뜨리면서 시대는 급변했다. 소련의 영향권에 있는 주변 국가들은 소련이 채택하고 있는 공산주의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자연스레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소련과 미국은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일컫는 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
1981년, 레닌그라드는 암울했다.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전쟁은 전쟁이었다. 소련은 서방의 문화를 철저히 배척했다. 당시 서방의 록을 들으려면 유일한 합법 록 공연장이었던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만 들어야 했다.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는 출입조차 허용하지 않고, 록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손을 흔든다거나, 박자를 타는 행동도 일절 금지되었다. 다른 감각은 닫은 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만 들어야 했다.
검열은 관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 서는 록 가수들도 공무원에게 가사를 허락받아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한국에서 1998년 일본문화가 처음 개방된 이후 영화 <러브레터>(감독 이와이 슌지)는 115만 명의 한국 관객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미 개봉하기 전 많은 사람들이 불법 비디오를 통해 영화 <러브레터>를 관람했다. 파악된 수만 30만 명이라고 하니 유명한 작품은 어떻게든 알음알음 찾아봤다.
자유는 금기를 뛰어넘는다. 청년이 적국 서방의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노인은 소란을 피운다. 누가 봐도 행패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 잘못은 노인의 행동이 아니라 청년의 노래였다. 경찰이 청년을 연행하면서 영화에서는 토킹 헤드(Talking Heads)의 ‘Psycho Killer’가 흐른다. 노래는 한 사람의 일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하모니를 담는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자 어떤 청년의 '이건 없던 일이에요'라는 대사와 함께 분명히 있었는데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행동한다. 이런 장면은 영화에서 몇 번 반복된다. 이기 팝(Iggy Pop)의 ‘The Passenger’, 루 리드(Lewis Reed)의 ‘Perfect Day’가 흘러나오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토해내지만 역시 없었던 일이다.
영화 <레토>는 빅토르 최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대에 더 집중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조용하게 리듬 타는 관객의 발을 비추고, 공무원들의 눈치를 보는 눈빛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빅토르 최는 1990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의혹이 불거졌지만 그런 일은 애초에 없었던 일이다. 영화에서 음악이 흐를 때마다 흑백 화면은 컬러로 전환한다. 이때만큼은 그토록 표현하고픈 열정을 되찾는 순간이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기 팝(Iggy Pop)의 ‘The Passenger’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으며 추운 겨울 저녁 조용히 걸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빅토르 최가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를 너무 당연시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먼저 관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