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1000호점에 애써 먼걸음하지 않는 까닭은?
‘공간’이라고 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공간을 방문한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목적’에 부합하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매일 아침마다 업무를 하기 위한 사무실에 도착할 것이고, 점심시간에는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을 찾는다. 퇴근길에는 동료와 술 한 잔 마시며 회포를 푸는 술집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주말에는 영화나 미술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는 극장이나 미술관으로 향하기도 한다.
‘제3의 공간은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집처럼 편안한 비공식적 공공장소이다.’
-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 버그
퇴근 후 많은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스타벅스로 출근한다. 한때 한 끼 밥값에 해당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된장○’라고 불렀다. ‘값비싼 스타벅스 커피는 사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인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 카페는 커피만 마시러 가는 곳이었다면 요즘은 다른 목적을 하나 더 끼얹어 카페에 방문한다.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카피스족(카페+오피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라는 신조어에서 볼 수 있듯이 카페는 이제 공부를 하거나 작업을 처리하고 책을 읽고, 잠시 휴식도 취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스타벅스는 창립 이후 로고에 네 번의 변화가 있었다. 가장 최근인 2011년 로고를 바꾸면서 ‘커피(COFFEE)’라는 글자를 삭제했는데, 이는 커피 외 다른 사업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전략을 담은 동시에 세이렌(Siren)의 그림만 봐도 누구나 스타벅스임을 알 수 있는 글로벌 브랜드로 발돋움했음을 암시한다. 7년간 스타벅스코리아에서 인사팀장으로 재직한 주홍식 씨는 2017년 책 <스타벅스, 공간을 팝니다>를 출간했다. 그가 출간한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공간을 팔겠다는 스타벅스의 경영 철학은 한국 커피 전문점 시장에서 그대로 적중했다. 스타벅스의 매출은 2016년 이후 3년 연속 매출 1조 원을 넘었다. 경쟁 커피 전문점들은 트렌드의 변화를 감지하고 스타벅스와 같은 노선을 택했지만, 커피빈은 커피만을 팔겠다는 기존 경영철학을 고집했다. 카페에서 일과 휴식을 포함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커피빈에서 무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고 콘센트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충전하기도 어려웠다. 불편한 나머지 그들은 점차 커피빈에서 발길을 끊었다.
그 결과 커피빈은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나서야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2016년부터 부랴부랴 매장에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고 콘센트를 늘리기 시작했다. 스타벅스는 커피와 더불어 공간을 판매하면서 ‘스타벅스 커피가 사치다’는 인식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커피빈은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고, 콘센트를 늘리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여전히 다양한 활동을 하기 불편한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필자의 집 근처에서 노트북을 들고 작업하기 가장 편한 곳이 커피빈임에도 갈 때마다 자리가 넉넉하다. 2010년 초만 해도 스타벅스와 국내 커피 전문점 시장을 양분하던 커피빈은 이제 스타벅스의 라이벌이 되지 못한다. 스타벅스는 커피 값이 비싸지만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의 매력이 더 크게 체감되면서 한국인에게 대표적인 제3의 공간이 되면서 국내 시장에서 폭풍 성장하고 있다. 지금도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갈 때마다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책 <The Good Great Place>에서 제3의 공간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가정을 뜻하는 제1의 공간과 일터를 뜻하는 제2의 공간과 달리 제3의 공간은 가정과 회사에서 찾을 수 없는 활력을 되찾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일컫는다. 제1의 공간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 붕괴되고 점차 1인 가구 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2017년 기준으로 1인 가구 수의 비중은 전체 가구 수 중 28.6%를 차지한다. 3명 중 1명은 1인 가구인 셈이다. 1인 가구는 집과 회사에서만 머물지 않고 제3의 공간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자기 계발이나 친목을 도모하고, 여가 또는 취미 활동을 이어간다. 격식과 서열이 없고 누구나 출입이 자유롭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곳은 제3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대형 서점에 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책을 읽거나, 찜질방에 가서 피곤한 몸을 녹이거나, 극장에서 영화 관람하는 것까지 어떤 이에게는 귀찮은 일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소소하면서 확실한 행복의 요소가 된다. 제3의 공간은 꼭 물리적인 공간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브런치나 네이버 블로그 등에서 글을 쓰면서 만난 적 없는 독자들과 소통하거나 본인의 관심사 기반의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소속감을 느낀다. 때론 내 글을 읽지 않는 오랜 친구보다 내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겨주는 사람들과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과거에는 혼자 노래방을 가거나 여행을 가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혼자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나고, 취미를 즐기는 데 있어서 과거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아졌다. 이에 따라 혼자 노래를 쉽게 부를 수 있는 코인 노래방은 길거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혼밥족을 위한 음식점과 술집 등도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다. 1인 가구의 증가세에 따라 소비 시장도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걸 혼자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온라인에서는 금방 찾을 수 있다. 여행 관련 커뮤니티에서 ‘지금 치앙마이에 계신 분? 시간 되시면 저녁 같이 먹어요’라고 남기면 치앙마이 여행 중에 그 글에 관심 있는 사람이 댓글을 남긴다. 몇 마디 나눠보다가 괜찮으면 함께 저녁을 먹거나 여행의 일부를 같이 즐기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즐긴다.
현재 운영 중인 바스락모임도 그렇게 모이게 되었다. 티스토리 블로그 <누군가 피워놓은 모닥불>을 운영하면서 바인더 관련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올렸고, 혼자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면 재밌을 거 같아 모임을 만들고 모집 글을 올렸다. ‘아무도 신청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잠시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바인더에 관심이 많은 몇몇 분들이 신청을 했다.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20대부터 4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변호사, 교사, 개발자, 디자이너, 프리랜서 등 모임을 거쳐간 사람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나이, 직업, 사는 곳 등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모두가 참여하기 전부터 바인더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앞으로 꾸준히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목적이 동일하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무슨 일 하고 계세요?’와 같이 처음 만나면 으레 묻는 질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신 ‘바인더 몇 년이나 쓰셨어요?’, ‘어떤 바인더를 주로 사용하세요?’ 등 관심사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었다. 그렇게 바인더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로 모인 모임은 3년 넘게 운영되고 있다. 격식과 서열이 없고 매주 토요일 오전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만나니 함께 자기 계발할 수 있는 제3의 공간이 된 셈이다.
공간의 브랜드, 공간 매니저와의 거리, 공간 매니저와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의 가격,
공간의 자유, 공간의 익숙함, 공간의 분리, 공간의 네임밸류, 공간의 좌석, 공간의 위치
2018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람들이 공간에 대해서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공간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10가지 질문을 통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에 참여한 대부분은 스타벅스를 자주 찾는다고 했지만 설문 결과를 분석해보니 사람들은 공간 기획자의 취향이 묻어나는 개인 공간을 더 좋아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스타벅스는 1999년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1호점을 오픈한 이후 17년 만에 1000호점을 청담동에 오픈했다. 스타벅스를 열광하는 많은 사람들은 스타벅스 카드와 머그컵 등 굿즈를 수집한다. 수집은 개인 취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행위다. 스타벅스 관련 굿즈를 수집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00호 점도 아닌 1000호점은 스타벅스가 한국에서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주변에서 1000호점(청담스타R점)을 방문한 사람은 드물다.
※ 설문조사에 대한 결과는 브런치에서 발행한 글 <공간의 취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타벅스 고객들은 전 세계 어딜 가든 특별한 컨셉을 가진 몇몇의 매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즉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든, 여행 중에 방문한 스타벅스든 비슷한 경험을 얻는다. 스타벅스 1000호점(청담스타R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청담 근처에서 일정이 있어 잠시 시간을 보낼 겸 방문해볼 수는 있어도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와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청담스타R점을 방문하기 위해 애써 먼 걸음 하지 않는다.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로 각자의 취향은 획일화되어 있지 않다. 본인의 취향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 누구나 취향은 가지고 있다. 출출한 주말 저녁, 밖에 나가기는 귀찮고 배달 음식을 시키기 위해 배달앱을 실행한다. 지난번에 먹었던 음식은 이번에 선택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있으면 바로 주문하지 않고 이미 먹은 사람들의 리뷰와 리뷰 개수를 세어본다. 어차피 아는 맛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신중히 고른다.
공간을 바꿔가며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평소에 끌리는 공간이나 호기심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편이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공간을 찾거나 방문하는 것은 값비싼 탐색 비용이 뒤따른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 ‘강남’으로 정하면 불만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교통이 편한 것도 있지만, 평소에 멀다는 이유로 방문하지 못했던 매장이 강남에는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분당에 살고 있어 서울역 근처에 가고 싶은 공간이 생겨도 거리상 마음 편하게 갈 수 없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CGV용산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이맥스로 개봉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 가지 이유만 있을 때는 거리 ‘때문에’ 못 갔지만, 1+1이 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수 있다. 한 번만 찾는 공간이 있는 반면 마음에 드는 공간은 ‘다시 찾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계속 찾게 되는 공간은 단 하나의 이유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공간 인테리어, 편안한 의자와 같은 공간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기획자의 철학, 매니저의 친절함, 인사이트 있는 컨텐츠, 만족할만한 가성비 등과 같은 공간 소프트웨어가 복합적으로 동작하며 다시 오고 싶게 만든다.
성수동에 위치한 얼리브라운지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높은 천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간 곳곳을 둘러보면 자리마다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컨셉으로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워크스페이스는 자리마다 넉넉한 콘센트와 조용한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고, 커피 및 간식을 먹을 수 있는 바에서는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만남의 장소로 활용된다. 일과 휴식뿐만 아니라 평일 저녁에 요가 클래스도 운영되고 있어 한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공간에서 만족할만한 경험을 얻게 되면 SNS에 알아서 홍보를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취향을 저격한 셈이다. 공간 기획자는 공간을 기획할 때 이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오길 바라고, 그 사람들의 취향이나 선호도를 파악하는데 앞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이다. 반대로 공간을 쓰는 사람들도 본인의 취향을 분석해 자신에게 잘 맞는 공간을 찾는다면 만족도가 훨씬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