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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un 06. 2019

거장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이동진의 라이브톡, 영화 『기생충』


지난달 30일, CGV압구정에서 이동진의 라이브톡 행사로 영화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막상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니 생기가 돈다. 라이브톡은 밤 11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났다. 느지막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유독 기억에 맴돌았던 한 마디가 있었다.


영화 <기생충>은 이제 저한테 과거가 됐어요.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음 작품 시나리오 작업을 쓰고 있었어요.


내가 봉 감독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할 것이다. 과거에 충분히 고생했고, 누가 상을 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냈다. 고생의 대가로 누리는 몇 달간의 휴식을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일은 잠시 내려놓고 선선한 휴양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만끽한다. 그런데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내가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 대신 황금종려상을 타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오늘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이어간다.



배우 하정우는 영화 《베를린》 촬영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다음 작품까지 약 6개월의 휴가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1년부터 네 편의 영화를 내리 촬영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반년이면 푹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평소 하고 싶은 것을 펼치기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언젠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영화 《롤러코스터》 연출을 맡아 감독으로 데뷔했다. (2년 뒤에는 영화 《허삼관》 을 연출했다.)


내 주변의 배우들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잘 살펴보면 영락없이 직장인이나 운동선수 같은 일과를 보내는 이들이 많다. 특정한 직장에 매인 몸이 아니니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원 없이 놀고 불쑥 여행을 떠나거나 사는 장소를 바꾸기도 쉬울 것 같지만 아니다. 일정한 곳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언제 일이 들어오고 불쑥 스케줄이 잡힐지 모르니 늘 몸을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느슨하고 여유롭게 사는 보헤미안보다는 중요한 경기를 앞둔 스포츠 선수나 회사의 명운이 걸린 PT를 준비하는 직장인들과 더 닮아 있다.  

― 책 『걷는 사람, 하정우』


일찍 일어나고, 출퇴근 길에 책을 읽고, 퇴근 헬스장 가던 좋은 습관은 연휴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사라질 확률이 높다. 푹 쉬면 더 잘할 줄 알았는데 그런 휴식이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몸은 루틴이 바뀌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상의 변화를 최소화하고 매일 할 일에 집중한다. 소설을 쓸 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여섯 시간을 쉬지 않고 일한다. 오후에는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저녁 9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하루키는 30년 넘게 소설을 쓰면서 단 한 번도 슬럼프가 오지 않았다. 비결은 단순했다. 쓰기 싫을 때 안 쓴다.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만 소설을 쓴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 종종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 잡혀 "왜 이렇게 글감이 안 나오지?"라고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문장을 썼다가 다시 지우고, 예전에 썼던 글감도 들춰보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쓴 게 없다. 이럴 때마다 큰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지 않는 날에는 번역 일을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소설과 달리 번역은 다른 형태로의 이동이다. 고즈넉하게 몇 날 며칠을 번역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다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때 멈췄던 소설을 이어간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을 못 견디지만, 하루키는 그 일상을 소중히 여긴다. 책을 읽고 번역 일을 하고 밖으로 나가 달리는 일은 모두 소설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다. 그는 매일마다 기초 공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바심을 느끼지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오늘 해야 할 분량만 채운다. 그의 루틴에서 "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은 되는 대로"라고 말하던 이동진 평론가의 좌우명이 떠오른다.


그는 원고가 완성되면 편집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퇴고 의견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물론 퇴고를 수용할 뿐, 다른 사람이 제시한 방향은 수용하지 않는다.)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책이 완성돼도 그는 출판사에서 마련한 출판 행사보다는 다음 작품 집필 활동에 힘을 쓴다. (아직 써야 할게 많다고 한다.)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면서 일본 사람 특유의 겸손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하루키만의 단호함도 엿보였다.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한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챕터에서는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꾸준한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예컨대 이런 내용이었다. 꼭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소설이라는 분야 자체가 누구나 쓸 수 있기에, 번득이는 스토리로 책 한 권은 쓸 수 있지만 두 권은 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는 운이지만, 두 번째는 실력이다) 


황금 종려상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 작품에 대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까. 오래간만에 찾아온 휴가 때 쉬는 걸 포기하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을까. 몇 년 간 소설을 쓰고 나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나서도 그걸 모른 체하고 다음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재능도 중요하지만 역시 의식적인 노력이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늘도 어제처럼 이어가고 내일도 달리는 것. 이게 거장들에게 배운 일상을 대하는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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