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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용마 Jun 18. 2019

행복하려면 즐길 줄도 알아야 해

책 『행복의 조건』을 읽고

픽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 <>(2009)의 오프닝 장면은 생각이 날 때마다 다시 찾아보게 된다. 모험을 좋아하던 꼬맹이 칼과 엘리가 어린 시절에 만나 결혼을 하고, 백발의 노부부가 되기까지의 모습을 그려낸 오프닝 장면의 10분은 벌써 수십 차례 봤음에도 볼 때마다 내 인생이 영화와 맞닿는 지점에서 뭉클해진다.


이토록 아름답고 뭉클한 오프닝 장면이 또 있을까

어떤 삶을 살았든 좋은 순간만 간직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영화 《업》 에서 상냥한 로맨티시스트였던 칼 할아버지는 부인 엘리와 젊은 시절 둘만의 꿈이었던 모험을 떠나기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은 번번이 일상을 유지하는데 쓰였다. 어느덧 백발의 노부부가 된 그들은 덜 긴급하다는 이유로, 덜 중요하다는 이유로 조금씩 뒤로 미뤄두었던 꿈을 이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는다.


영화 《업》의 오프닝 장면 동안 칼과 엘리의 삶 전체를 조명했듯이, 하버드 대학교 연구팀은 1930년대 말부터 하버드 졸업생(그랜트) 집단 268명, 이너시티 집단 456명, 터먼 여성 집단 90명을 72년간 행복하고 건강한 삶에 법칙이 있는지 그들이 인생을 추적했다. 조지 베일런트가 쓴 『행복의 조건』 은 이 연구 결과를 요약한 책으로, 서로 다른 능력과 배경을 가진 세 종류의 집단을 전 생애에 걸쳐 관찰한 결과를 분석했다.


고고학자였던 조지 C. 베일런트는 그의 아들 조지 베일런트가 열 살 되던 해 44세의 나이로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베일런트는 그 사건 이후 평생을 타인의 삶 일대기에 관심을 가졌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 인간을 힘들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 강하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책에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년의 삶을 예견하는 행복의 조건으로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을 꼽았다. 50대에 이르러 그중 5~6가지를 충족했던 하버드 졸업생 106명 중 절반은 80세에도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였고, 50세에 세 가지 미만의 조건을 갖추었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코올 중독자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베일런트는 불행한 유년기와 알코올 중독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니, 알코올 중독자가 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지 않았으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서 다 알코올 중독에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알코올 중독자를 부모로 둔 이들의 유년기는 열이면 열 모두 다 불행했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읜 성인들의 삶은 평생 불행한가?

어린 시절 한쪽 부모를 잃거나, 고아로 성장한다는 것 자체는 인생의 특정 시기에 잠시 불운을 드리웠지만, 삶 전체에 있어서 그다지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단 부모를 죽음으로 몰았던 유전병을 물려받는 경우는 예외였다.


어떤 사람이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을 맞이하게 되는가?

47세 즈음까지 형성된 인간관계는 방어기제를 제외한 어떤 다른 변수(교육, 결혼,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 보다 훨씬 더 이후의 인생을 예견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대부분은 적어도 50세 이전까지는 체중, 운동, 담배, 알코올을 조절할 수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꾸준히 치료를 받는다면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얼마든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고, 부적절한 방어기제를 줄여나갈 수 있다. 활기차고 건강한 노년은 뜻밖의 행운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즐길 줄도 알아야 해

성공적인 노년에 이르는 길은 수없이 다양하지만, 그렇지 않은 노년의 길은 딱 하나다. 귀를 막고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을 비관하면 된다. 65세를 넘어서면 세속적인 지위는 더 이상 중요한 목표가 되지 않는다. 노년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능력 중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보다는 삶을 즐길 줄 아는 능력, 즉 혈기 왕성한 새끼 고양이처럼 지칠 줄 모르고 노는 능력이 더 쓸모가 있다.


"나는 한 번도 멈춰있던 적이 없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말은 자아를 탐색하는 10대와 20대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생활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30대와 40대부터 산전수전 겪은 50대들도 이것저것 열심히 하면서 살았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사람들이 청소년기가 지났음에도 자아 탐구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평생 세상을 읽으려고 했지 나 자신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줄 알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는 노는 게 어색하다. 공부에 전념하는 청소년이나 일하기 바쁜 성인들은 항상 '긴급하고 중요한' 할 일들에 치여서 놀기 조차 쉽지 않다. 타이틀만 좇는 사람은 은퇴 후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타이틀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신체건강이 양호한 것보다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성공적인 노화에 훨씬 더 중요한 요소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이 병자라고 느끼지 않는 한 아프더라도 남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다.
― 책 『행복의 조건』



작년 11월에 썼던 글 <일상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면>은 고작 취미 하나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든다고 이야기했지만, 책 『행복의 조건』을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취미는 일상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뒤흔든다. 


TED 강연 중인 마사코 할머니와 그림 그리고 있는 모지스 할머니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_78세 터먼 여성   


책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를 쓴 와카미야 마사코 할머니는 노인들을 위한 앱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며 82세의 나이로 iOS 앱을 개발해서 화제를 낳았다. 책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를 쓴 모지스 할머니는 76세에 그림을 시작해 101세의 나이까지 왕성한 화가 활동을 이어갔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며 시작을 두려워했던 내가 82세, 76세의 나이로 새로운 도전을 한 할머니들의 책 제목에서 되려 깊은 울림을 받는다. 우리는 미리 결정 짓지 않으면 결론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의 말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사랑의 빈곤이다.
사람들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던 연구 대상자들은 내가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흥미진진한 연구에 참여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평생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오면서, 사랑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연구 대상자들은 나를 무력하고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할 얘기가 많은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진이 빠지거나 우울해지기도 했다. 

― 책 『행복의 조건』


베일런트는 평생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보다는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의 아버지와 비슷하게 삶의 불안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삶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성인발달연구에 힘을 쏟은 그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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