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열두 발자국』을 읽고
일주일 전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카카오 브런치에서 메일이 하나 왔다. 메일 본문에 있는 초대장 내용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국제도서전을 홍보하기 위해 브런치 작가 전부에게 보낸 건지, 아니면 선정된 100편의 글을 쓴 작가에게만 보낸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브런치 측에 문의를 넣었더니 후자가 맞았다. 그런데 선정 후에 일방적 통보라니. 어떤 글이 실렸는지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데, 브런치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조회수가 가장 높았던 『퇴근 후 스타벅스로 출근하다』일까? 공유수가 높았던 『작지만 확실한 하루를 위한 5가지 제안』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는 바로 어제. 6월 19일. 오전 시간을 활용해서 잠시 다녀왔다.
백화점 명품관처럼 근사하게 꾸며놓은 브런치 부스에 입장해서 확인을 받고 큐레이터 뒤에 있는 벽면에 있는 브런치북(?)을 꺼내 글을 볼 수 있는 QR코드를 받았다. 선정된 글은 1년 하고도 3개월 전에 쓴 매거진 《스물아홉에 쓰는 퇴사일기》의 첫 번째 글이었던 『아쉬움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였다. SNS에서 유명한 농담 중에 "퇴사하는 사람은 모두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나도 그중 하나였으니) 17편으로 마무리한 이 매거진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다시 읽어보는데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가 지금 다니는 학교가 너무 싫어서, 지금 다니는 회사가 싫어서 그만두는 건 좋은 의사결정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건 괜찮지만, 지금 이게 싫으니까 그만두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대책도 없죠. 그 순간 너무 싫기 때문에 도망치듯 그만두지만, 그 자체가 보상이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만두는 순간,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전략이 다시 바뀌게 됩니다. 무직 상태이거나 학교도 안 다녀서 빨리 뭔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앞에서 본 마시멜로 챌린지의 인센티브 실험처럼 시야가 좁아지고 취직 자체가 중요해져 버려 꿈꾸던 무언가에 도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터널 비전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지금의 자리가 싫다면, 뭘 꿈꿔야 할지 계속 고민하면서 대안을 찾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책 『열두 발자국』
퇴사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 전 가장 큰 걸림돌은 돈이 아니라 불안감에 따른 뒤늦은 후회였다.
'막상 그만뒀는데 퇴사를 후회하면 어떡하지?'
'할 게 없으면 어쩌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
'통장 잔고가 줄어들 텐데 못 버티면 알바라도 해야 하나?'
영화 《어벤져스3 : 인피니티 워》에서 아이언맨이 타노스와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닥터 스트레인지는 뒤에서 가부좌를 틀고 타임스톤으로 타노스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 모습은 닥터 스트레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퇴사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정했고, 어떻게 후회를 최소화할 것인가를 계속 시뮬레이션했다. 아쉽게도 내겐 타임스톤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온갖 야근과 출장 등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버티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싫어서 홧김에 그만두는 타입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후회를 최소화하는 출구 전략을 세워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어찌저찌 1년 넘게 탈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퇴사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지인들은 회사 밖에서 생활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회사 밖 미래를 그리는 듯했다.
그만두든, 그만두지 않든 누구나 후회를 한다. 후회 자체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할 건 많다. 귀찮을 뿐. 회사에서는 귀찮더라도 억지로 해야 하니 그게 싫은 거다.
얼리어답터였던 내가 돈이 궁하니 레이트 어답터로 바뀌더라. 역시 환경 설정이 최고다.
젊은이들이 제게 종종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뭘 골라야 하나요?”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대개 성공한 멘토들은 쿨하게 “인생은 짧습니다. 진정 좋아하는 걸 하세요!”라고 답하죠. 그런데 실상 이 질문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잘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잘하는 게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잘하는 걸 꾸준히 하다 보면 즐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좋아하는 것도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뭔지 찾을 시간이, 기회가,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 책 『열두 발자국』
본인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한 사람 중에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브런치 작가전에서 선정된 내 글의 제목처럼 '아쉬움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퇴사할지 말지 고민 상담하러 오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선택과 달리 이직할 회사가 구해진 거 아니면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권유한다. 나는 그나마 회사 다닐 때부터 갈고닦았던 '글쓰기', '독서', '강연' 등으로 퇴사 후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불안을 잠재울만한 경험이 별로 없다.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 또는 주말 시간을 활용해 오랜 시간 쌓고 나와야 한다.
회사에서는 성과만 내면 된다. 그에 따른 리스크는 회사가 책임진다. 밖에 나오는 순간 성과와 위험관리 모두 전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한다. 스타트업 창업 중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은 나이는 20~30대가 아니라 40~50대였다. 중년 창업자가 성공적으로 투자금 회수(exit)할 확률은 20~30대보다 1.8배 높았다. 성과는 누구나 낼 수 있지만, 위험관리 능력은 경험에 의해서 축적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20~30대에 창업을 성공한 대표를 보면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많은 실패를 경험한 경우가 많았다.)
지도를 그리는 빠른 방법이란 없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시간만이 온전한 지도를 만들어줍니다. 유치원생의 마음으로 미친 듯이 세상을 탐구하세요.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얻게 되는데, 그 지도가 아무리 엉성하더라도 자신만의 지도를 갖게 되면 그다음 계획을 짜고 어디서 머물지를 계획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인생 동안 그 지도를 끊임없이 조금씩 업데이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길을 물어보면 여러분의 지도를 보여주며 ‘나는 이 지도로 내가 갈 곳과 머물 곳을 정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책 『열두 발자국』
이 책에서 정재승 교수는 성공확률 100%인 리더가 되는 방법을 소개한다. 아무 의사 결정도 하지 않고 아주 확실한 것만 결정하면 된다. 그러면 조직에서 100% 정확도의 의사결정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조직에 이로운 것일까? 결정한 사항뿐만 아니라, 결정했어야 하는 수많은 순간들을 놓친 것도 정확도에 포함시켜야 한다. 좋은 의사 결정자는 놓쳐서는 안 될 의사 결정을 해내는 사람이다.
의사 결정을 할 때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선호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평소에 짬뽕과 짜장면 중에서 고르지 못해 '아무거나'라고 외쳤다면, 오늘부터는 직접 골라보자. 내일은 다른 사람의 메뉴도 골라주자. 그리고 실패에 따른 원망도 듣고 비난도 감수하자. 그런 경험이 쌓여야만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제대로 설정된 지도를 그릴 수 있다. (아, 참. 그리고 퇴사는 하지말고요. 저는 다시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며.
P.S. 책 『열두 발자국』은 정재승 교수의 저서답게 술술 잘 읽혔지만, 학자 관점에서 너무 바른 소리만 늘어놓은 점이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좋은 의도인 거 알겠고, 좋은 이야기인 거 알겠지만 막상 삶에 곧이곧대로 적용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열두발자국 #정재승